역주행의 시대
역주행의 시대다. 있었는지도 몰랐던 노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사람들은 이내 그 노래에 빠져든다. 빠져든 사람들은 그 노래 하나에서 멈추지 않는다. 노래를 부른 가수나 멤버 하나하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리즘을 따라 여행한다. 그곳엔 노래와 멤버뿐 아니라, 역주행 이전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들이 한가득이다.
알고리즘이 없던 시대에도 역주행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역주행은 가수 임창정이었는데, 1997년 영화 〈비트〉 조연 출연을 기점으로 그의 연기와 노래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그때 또다시」란 타이틀 곡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더니, 그가 1995년 내어놓았던 「이미 나에게로」라는 노래는 말 그대로 역주행을 했다. 당시 ‘길보드’의 모든 리어카 스피커는 임창정의 노래만 틀던 그때였다.
방송엔 그가 나오지 않는 채널이 없었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개그면 개그, 토크면 토크. ‘만능 엔터테이너’란 말은 그를 위한 수식어였다. 하지만 당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임창정의 전성기 뒤에 있던 그의 발자취였다.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인 줄 알았는데 그의 과거는 초라했다. 1990년 영화 〈남부군〉을 시작으로 수많은 조연과 단역을 전전하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마음은 대중에게도 전해졌고, 그의 인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했다. 그 인기는, 자신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어느 젊은이에게 대중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정도였을 것이다.
‘역주행’은 ‘재조명’이다
이젠 알고리즘이 역주행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역주행 뒤 발자취를 좀 더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고리즘의 논리와 방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기술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바람과 욕구 그리고 시대의 정서에 따른 변동 값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역주행은 ‘재조명’이라는 것이다. 그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다시 알아보게 되는 것. 진가를 몰랐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대중의 정서가 깊게 배어 그 인기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인정받게 되는 그 과정은 대중에게 이상야릇한 쾌감을 선사한다. 마치 내가 잘된 것 같은, 내가 아는 사람이 성공한 것 같은, 어려운 사람이 힘든 시간을 이겨 내고 성공한 것 같은 마음. 어쩌면 내가 하지 못한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 이루어주었다는 대리만족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역주행 뒤에 있는 것들
최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역주행’이라는 단어는 달리는 차선을 반대로 달려 남에게 피해 준다는 원래의 뜻과 다르다. 누구든 공유하는 점일 것이다. 재미있는 건, 아무도 처음에는 ‘역주행’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와 같이 ‘순주행’을 바랐을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얻고, 어떤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하고자 하는 마음. 그러니까 역주행은 그들의 뜻이 아니고, 그들의 방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역주행의 힘은 대중이 알아주지 않을 때 그들이 했던 ‘순주행’의 발자취다. 파 내려가다 보면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한 공감이 커지게 된다. 공감이 커지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응원하게 되며, 응원하게 되면 말 그대로 그들에게 빠져들게 된다.
그러니 그 의미를 곱씹어 본다. 역주행을 하는 모든 것엔,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첫째, 꾸준함
나는 BTS가 어떻게 이렇게 큰 영향력을 만들어냈는지, 세계적인 팬덤을 창조해냈는지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니, 잘 모르겠다기보단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느껴진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춘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가수나 그룹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가 우러러보는 뮤지션이 되진 않는다. 심지어는 한국말로 노래를 하는데도, 이러한 인기를 얻고 유지한다는 걸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 하나.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꾸준했다는 것이다. BTS 첫 앨범은 2013년에 발매되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앨범 수는 46개에 달한다. 그나마 이름을 알린 〈화양연화〉 시리즈가 나오기 전엔 무려 10개의 앨범이 있었다. 그들은 꾸준히 음악을 하고 춤을 췄다. 한 걸음씩 더 나아갔다. 그들의 꾸준한 발자취가 결국 모든 이들에게 감동시킨 것이다.
한 방송사의 9시 뉴스에서, 밤을 새우며 BTS 콘서트 줄을 선 한 미국인 주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는 말했다.
멤버들을 집에 데리고 가 맛있는 걸 먹이고 푹 재워주고 싶어요.
그녀의 이 말에는 그들의 꾸준함을 공감하고 보듬어 주려는 모든 팬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둘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견디는 힘
최근 역주행의 아이콘은 단연코 브레이브 걸스다. 알고리즘이 이끈 역주행 전날, 한 멤버는 다음 컨셉은 무엇이냐는 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 다음이 있을까요?
누가 봐도 그럴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역주행 후 그 영상은 수많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팬들로 하여금 더 많은 위로와 공감을 하게 만들었다.
브레이브 걸스가 견딘 시간은 이슈가 된 군부대 무대를 이끌어냈다. 공중파에 설 기회가 없던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군부대 무대에 열심을 다했다. 대중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대를 혼신의 힘을 다해 채운 것이다. 왕복 12시간이 걸리는 백령도 공연에 대한 에피소드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는 마음.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연예인에게 주어진 무관심. 그럼에도 웃으며 무대를 환하게 채운 그들에겐 분명 견디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소통
사람은 주눅이 들면 소통이 줄어든다.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싸인 사람이 누군가와 활기차게 그것도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BTS와 브레이브 걸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했다. 소통의 이유도 간단하다. 그들에겐 무대가 없었기 때문에, 동영상 플랫폼이나 SNS로 소통을 이어간 것이다. 더불어 자신들을 사랑해주는 초기의 몇 안 되는 팬들에 대한 감사함도 있었을 것이다.
이 영상에서 브레이브 걸스 의 데뷔 팬이 말했다.
제가 준 사랑이 제일 작은 사랑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소통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BTS 또한 초기부터 팬들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친근하게 보여준 소통으로 유명하다.
진정한 소통은, 역주행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잘 나가지 못하더라도, 주눅 들더라도 나와 나를 사랑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의 진정한 소통은 결국 나를 일으키는 큰 힘이 된다.
우리의 삶에도 ‘역주행’이 올까?
‘역주행’은 ‘재조명’의 다른 말이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서라도 다시금 인정받는 그 순간을 말한다. ‘역주행’을 끌어내는 방법은 바로 역주행하려는 전략 수립이나 목표 설정이 아니다.
바로, ‘순주행’을 하는 것이다. 순주행은 내 갈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의미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역주행을 원하지는 않았다. 임의로 그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그저 꾸준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진정한 소통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게 바로 진정한 역주행의 비결인 것이다.
어느 누군가의 인기나 역주행을 마주한다면, 나는 이제 그 뒤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려 한다. 질투나 열등감으로 그들의 결과를 속단하지 말고, 알지 못했던 시간과 정성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드러나기까지 겪었던 과정과 어려움 그리고 꾸준함은 분명 나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역주행 뒤에 있는, 보이지 않던 그것들에게 나는 경의와 박수를 보낸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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