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미루는 사람들의 함정이다.
- 리타 엠멋
나는 살바도르 달리의 ‘완벽하려 하지 마라. 어차피 완벽할 수 없을 테니까.’란 말을 좋아한다. 아니, 신봉한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꾸만 딴짓하던 나를 돌아보면, 과연 나는 완벽함의 허상에 사로잡혀 중요한 일보다 당장 내가 이룰 수 있는 일들로 분열하곤 했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하려 책상 앞에 앉았다가 결국 나는 책상 얼룩을 물티슈로 ‘완벽히’ 지워내는 데 골몰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얼룩이 완벽히 지워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완벽(完璧)’은 ‘완전한 구슬’을 말한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은 초나라 사람 화씨가 만든 구슬이란 뜻으로, 천하의 명옥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나라의 ‘인상여’라는 사람이 그 구슬을 탐냈던 진나라 소양왕으로부터 하나의 흠집 없이 그 구슬을 되찾아온 게 정확한 유래다. 구슬 자체가 완벽한 게 아니라, 흠집 없는 구슬을 아무런 문제 없이 찾아온 그 과정이 ‘완벽’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때로 과정 없이 결과를 이루려고 하는 욕심에 휩싸이곤 한다. 마치 내가 내 그림자를 앞서가려는 오만과 어리석음이다. 나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를 떼어 놓고 앞서갈 수 없다. 오히려 조급하고 성급한 마음뿐이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만다.
즉,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흠집들로 아예 시작을 하지 못하거나, 시작을 했더라도 이내 주저앉는 결과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완벽한 시작은 없다!
실리콘밸리와 한국을 오가며 스타트업의 인사이트를 전하는 유튜브 채널 ‘EO’의 대표는, 여러 창업 실패 후 수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스타트업의 성지인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며 진로를 생각해보기 위함이었다.
그가 실리콘밸리 여정을 택했을 때, 그에겐 어떠한 계획이 있었을까? 구독자 36만 명을 거느리며 여러 직원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지금 그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분명코 그에겐 완벽한 계획이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저 카메라와 삼각대만 챙기고 출발했을 뿐이다. 출발 직전 실리콘밸리 내 한국인 커뮤니티에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를 남긴 게 다였다. 도착하자마자 공항 어느 곳을 뒷배경으로 삼아 첫 콘텐츠 영상을 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큰 인사이트와 위로를 얻고 지금의 채널을 키워낸 것이다.
변명 없는 묘지는 없겠지만, 계획 없는 시작은 있을 수 있다. 아니, 바꿔 말하면 완벽한 시작은 없다. ‘시작’이라는 말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이라는 단어에 완벽하게 매몰되어 버린다. 시작부터 그것을 추구하느라 시작조차 못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과연 완벽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완벽을 추구하기보단, 차라리 대충 시작할 것
‘완벽’은 ‘완벽’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그 말을 완성하고자 하는 단어의 농간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완전은 불완전보다 하위 개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완벽을 추구하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불완전해지고, 불완전성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나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정’과 ‘결과’다. ‘완벽’은 ‘결과’에 매몰된 우둔함이다. 그래서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기는 게 필요하다. 오히려 과정을 중시하게 될 때, 우리는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완성에는 가까워질 수 있다. 때로 과정에서 오는 결과는 하나 이상일 경우도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시작하고 끝맺으려 할 때보다 양질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볼까? 내가 첫 책을 출간했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일종의 ‘작가병’에 걸려 출간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 기준 ‘완벽한’ 목차를 세워 두 번째 책을 기획했다. 그러나 그 책은 아직도 출간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하게 책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써 내려간 글이 출판사의 제의를 받아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대체 그 ‘완벽함’은 누구의 것인가 말이다.
완벽한 계획을 세워 수행하던 것보다는, 당장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벌여 놓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 ‘벌인다’라는 단어는 완벽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벌여 놓으면 시간은 내 편이 된다.
함께 쓰고 출판하는 ‘글쓰기 프로젝트’나, 내가 기획했던 강의와 세미나들은 애초에 완벽한 콘텐츠 기획을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수습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질이 다른 몰입을 할 수 있었고, 내 능력의 100% 이상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벌이고 수습하지 못하면 사기꾼이 된다. 정해진 기한, 의무감, 해내고야 말겠다는 열정과 의지가 ‘완벽함’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마치며
레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한, 마음의 평안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조지 피셔는 말했다.
완벽이라는 과녁을 향해 쏜다면, 그것은 움직이는 타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티븐 호킹도 말했다.
기대치를 0으로 줄이는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말들에 정말이지 뼈저리게 공감하고, 그 저의를 실감한다. 완벽할 수 없는 존재가 완벽을 이루려는 아둔함은, 저기 어디에선가 우리를 바라보는 절대자가 혀를 차고 웃을 일이다. 과거의 현인들도 이미 그것을 깨닫고 주옥같은 말들을 많이 쏟아내었다.
우선 대충 시작하자. 대충이라도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내가 부족한 걸 느끼고,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성장이 이루어진다. 완벽하려는 허상은 결국, 나 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런 마음에도 ‘완벽해져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미국의 유명 자기 계발 작가인 웨인 다이어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가장 적게 인정받고, 인정받을 필요를 적게 느낄수록 가장 크게 인정받는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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