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어린이날 하면 방정환 선생님을 떠올리듯이, 미국에서는 아동도서 하면 대표적으로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Theodore Seuss Geisel), 일명 ‘닥터 수스(Dr. Susse)’ 작가를 ‘20세기의 안데르센’으로 높이 칭송한다. 매년 3월 2일은 닥터 수스의 탄생일로 그의 업적과 인기를 기려 ‘미국 독서의 날’로 지정될 정도로 그 인기와 영향력이 대단하다.
학교마다 닥터 수스 주간을 기념하며 다양한 테마의 독서 이벤트가 열린다. 책의 캐릭터를 피처링해, 월요일은 책의 주인공처럼 모자 쓰고 오는 날(Hat Day), 화요일은 웃긴 머리 모양하고 오는 날 (Crazy Hair Day), 수요일은 엉뚱한 양말 신고 오는 날 (Crazy Socks Day) 등,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행사로 가득하다.
오랜 세월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미국의 웬만한 아이 키우는 집에는 닥터 수스의 책 두세 권이 기본으로 있거나, 전집을 모두 소장하는 열성 팬도 꽤 많다. 때문에 최근 그의 기념일에 발표된 닥터 수스의 책 6권에 대한 판매 중단 결정은 그래서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동도서 최고봉 ‘닥터 수스’ 책이 출판 정지된 이유
그 이유가 더욱 이목을 끈다. 닥터 수스 엔터프라이즈(Dr. Seuss Enterprises) 출판사의 성명서를 보면 “해당 책들이 잘못되고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묘사(These books portray people in ways that are hurtful and wrong)”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인을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하고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한 부분이나, 아프리카인을 셔츠나 신발을 착용하지 않으며 마치 원숭이를 닮은 것처럼 그린 걸 인종차별적 묘사로 간주했다. 작년부터 미국 사회 전반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이 크게 이슈화되고 인식이 확대되면서, 최근 인종차별에 민감한 미국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듯하다.
일단 잘못된 것을 수정하려는 과감하고 용기 있는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동안 우리가 인종차별적 장면에 얼마나 무감각하고 무지했는지 깨닫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전히 일부에서는 닥터 수스의 책이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을 비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했을 때 “저게 왜? 너무 민감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재미로 그런 것이라 여기고 별문제 없이 넘어가고 싶었을 수 있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아이의 권장도서로 수십만 권이 판매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얀 것은 좋은 것, 검은 것은 나쁜 것?
우리 사회에는 특정 국가나 인종을 떠올릴 때 적용되는 일종의 고정관념들이 있다. 책뿐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이미지를 점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광고나 미디어에서 아시아인과 흑인을 묘사하는 왜곡된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하얀 것은 깨끗한 것, 검은 것은 지저분한 것으로, 사람의 피부색에 해당 이미지를 투영한다. 자연스레 검은 피부보다 하얀 피부가 우월하다는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사회 곳곳에 자리 잡힌 성별,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해당 작품이나 내용이 특정 인종이나 문화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걸 환기해주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디즈니와 워너브라더스의 경고 문구 삽입
한 가지 예로 디즈니가 자사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에 고전 애니메이션인 〈피터팬〉 〈덤보〉 등과 같은 작품에 인종차별 경고문을 부착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과거 잘못에 대해 해당 작품 상영을 일괄 중지하기보다는 사회적 변화에 맞춰 관객들이 미리 인지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경고문구를 삽입한 것이다.
인디언 원주민을 묘사하는 방식이 미국에서는 민감한 주제일 수 있지만, 문화적 인식이 다른 동양에서는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아!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며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인종차별 콘텐츠에 대한 민감성을 일깨우는 데 도움 줄 것이다.
디즈니뿐 아니라 워너브라더스(Warner Bros) 또한 자사의 몇몇 만화에서 “인종적 편견”에 대한 경고문을 실어 왔다. 특히 문구 중 “제작 당시 모습을 그대로 상영하지 않으면, 과거에 이런 편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구문에 크게 공감한다.
당시에도 잘못됐고, 지금도 잘못됐다면
과거의 잘못한 것을 중지하고 없앤다고 해서, 그 잘못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닥터 수스의 책처럼 출판 정지 결정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인종차별적 요소에 대해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이 또한 하나의 레거시(legacy)로 남겨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번 닥터 수스의 책 출판 정지는 다양한 인종 및 문화와 더욱 얽히고설켜서 살아갈 우리에게 잘못된 과거를 어떻게 바로잡는 게 좋은지에 대한 더 큰 과제를 남겨준 것 같다.
[…] 이 영상은 특정 인종과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를 포함한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당시에도 잘못됐고 지금도 잘못됐다. 이 영상은 오늘날의 사회를 대변하지 않으나, 제작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상영하지 않으면 과거에 이런 편견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에 당시 그대로 상영된다.
[…] may depict some ethnic and racial prejudices that were once commonplace in American society. Such depictions were wrong then and are wrong today. While not representing the Warner Bros. view of today’s society, these shorts are being presented as they were originally created, because to do otherwise would be the same as claiming these prejudices never existed.
- 워너 브라더스의 콘텐츠 경고 문구
원문: 켈리랜드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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