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평론가 이범의 책이다. 매우 재밌게 봤다. 분량이 매우 짧다. 문고판 크기이고, 분량은 약 200쪽이다. 내용도 무난하고, 구어체로 씌여 있어 정말 술술 읽힌다. 목차는 5개 파트이다.
- 우리가 받아온 교육의 정체
- 정답 없는 문제를 탐구하는 시대
- 탈스펙과 탈학벌, 노동시장의 변화
- 양극화와 임박한 파국
- 청년, 진보의 통념에 도전하라
전체적으로 볼 때,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 청년들이 가볍게 보면 좋을 책이다. 사회 변화의 큰 트렌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먼저「우리가 받아온 교육의 정체」는 한국 및 아시아 교육의 특수성을 다룬다. 즉 선다형 객관식 시험과 석차 매기기를 뜻한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선다형 객관식 시험을 보지 않는다. 논술형 시험을 치룬다. 석차 매기기(랭킹) 역시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정답이 여러 개 있거나 정답이 없는 경우도 많은데, 한국 학생들은 ‘정답이 정해져 있는’ 사고에 훈련된다. 심지어 ‘정답은 문제집 뒤에 다 나와 있는’ 사고방식으로 훈련된다. 그래서 고교학점제(=수강신청제) 방식으로 전환 필요성, 논술형 시험으로의 전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정답 없는 문제를 탐구하는 시대」는 소위 4차 산업혁명시대 담론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고용보험 및 직업 재전환 시스템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2.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탈스펙과 탈학벌, 노동시장의 변화」였다. 이 분야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고민했던 교육 전문가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왜 형성됐을까? 흔히들 한국을 학벌 사회라고 부르지만, 이게 왜 형성됐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이범은 학벌 형성의 원인을 추적한다. 공공부문 학벌 형성과 민간부문 학벌 형성을 구분해서 접근한다.
첫째, 공공부문 학벌 형성의 원인은 대학 입시 방식과 공무원 선발 방식(=고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유사한 시험방식이기 때문에 ‘서울대 합격에 유리한’ 사람과 ‘고시 합격에 유리한’ 사람은 같은 원리를 가진다. 한마디로 입시와 고시 모두 시험형 인간에게 유리한 방식이다.
예컨대 1970년대 노무현 대통령이 사시에 합격했던 해 사시 합격자 숫자는 60명이었다. 그중에서 40명이 서울대 출신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도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시에 합격했던 1980년에도 경희대 합격자는 딱 1명이었다. 딱 1명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합격자의 대부분은 서울대였고, 그다음이 연세대와 고려대였다. 요컨대 공무원 합격순서와 대학 서열 합격 순서는 사실상 유사했다. 그게 공공부문 학벌 형성의 원인이다.
둘째, 민간 부문 학벌 형성이라는 원인이다. 민간 부문에서 학벌이 형성된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이 정부 주도 경제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정부의 파워가 엄청 중요했다. 정부와의 관계가 중요한 대기업들일수록 공무원의 학벌에 맞춰, 기업 임원 학벌을 맞출 필요성이 커졌다. 요컨대, 정부 공무원의 태반이 서울대이기 때문에, 을(乙)의 처지에 있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서울대 출신’으로 임원을 채워야 정부와의 ‘끈’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었다. 갑에 맞춰 을 쪽에서도 진용을 짠 것이다.
3.
이범은 현재 한국은 탈학벌, 탈스펙 경향이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탈학벌, 탈스펙이 진행되는 동력은 크게 3가지이다.
탈학벌의 첫 번째 원인은, 정부가 더 이상 갑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은 선별적 산업정책 등의 명분으로 대기업들에게 엄청난 금융혜택을 줬다. 그러나 그런 정책수단 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더 이상 정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학벌 중심으로 임원을 구성할 필요가 사라졌다.
한국 대기업의 주력은 수출·제조업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모비스, SK하이닉스, SK에너지, LG전자, LG화학 등이 모두 그렇다. 수출·제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학벌 중심으로 임원을 뽑는 것보다 능력 중심으로 뽑는 게 더욱 중요해졌다.
이범은 2014년 삼성그룹 사장 승진자 명단을 예시로 제시한다. 새로 사장이 된 사람은 8명이었다. 이 중에서 이건희 회장 딸을 제외한, 7명의 출신대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대, 성균관대, 중앙대, 한국외대, 숭실대, 성균관대, 서강대 각 1명씩이다. 7명 중에서 ‘스카이’ 출신은 1명뿐이다.
우리나라 1000대 상장사의 CEO 중에서 스카이 출신의 비율을 뽑은 위 그림을 봐도 마찬가지다. 2007년 스카이 출신 CEO 비율은 59.7%였는데, 2013년에는 39.5%로 줄었다. 불과 6년 사이에 20.2%p가 줄어든 것이다.
월간 <현대경영>에서 조사한 「최근 24년간 100대 기업 CEO 중 서울대 출신 추이」도 SKY 출신의 감소를 보여준다. 1994년 53.9%에서 2017년에는 24.6%로 줄었다. 23년간 거의 절반 수준인, 29.3%p가 줄었다.
탈학벌의 두 번째 원인은, 기업이 정기 채용에서 수시 채용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정기채용 관행은 고도 성장기의 산물이다. 한국과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때는 대졸자의 구직난보다 기업들의 구인난이 심했다. 기업들은 졸업 예정자를 미리 채용하는 입도선매(立稻先賣)를 하게 된다. 입도선매를 하게 될 경우, 인재상은 제너럴리스트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구인난보다 구직난이 더 심해지고,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시 채용이 확산되고 있다.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아는, 기업 팀장의 인사권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 경우, 해당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을 선호하게 된다. 전문성을 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경력과 평판이다.
탈학벌의 세 번째 원인은, ‘도련님, 공주님의 출현’이다. 도련님, 공주님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거나, 얌체족이거나, 자율적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이상 3가지가 학벌과 스펙의 가치를 예전이 비해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요새는 서울대 다니는 학생들도 취업 걱정 한다면서요?”라는 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대생도 취업 걱정을 한다는 것이 취업난의 심각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종종 언급되는데, 이건 너무 거친 논리입니다. 지금 서울대 정원이 고졸자의 0.5%밖에 안 되거든요. 제아무리 취업이 힘들어지고 좋은 일자리가 적어졌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때 상위 0.5%에 해당하던 사람들이 취업 걱정을 하게 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이건 취업난의 증거라기보다는 ‘노동시장의 성격이 변화한 탓‘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즉 한편에서는 명문대라는 간판의 가치와 후광 효과가 하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문성’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내재적 가치를 요구받게 되는 것. 이것이 서울대생이 취업 걱정을 하게 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요.”
- p.124~p.125
4.
「양극화와 임박한 파국」은 임금 격차 양극화를 다룬다. 원청-하청의 불공정을 다루고, 한국 노동운동의 기업별 교섭이 임금 격차를 확대시켰음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한번 비정규직에 빠지면 덫이 되어 계속 머무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청년들 개개인은 상층 노동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합리적 선택의 일환으로) ‘공시족’이 증가하게 된다.
「진보의 통념에 도전하라」는 내용은 평소 소신이었던 애국 진보, 청년들의 단결, 연대를 위한 양보를 강조한다. 애국 진보는 나처럼 과거 운동권 영향을 받은, 86세대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조언이다. 그러나, (과거 운동권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지금 청년 입장에서는, 오히려 너무 당연한 내용으로 들릴 듯싶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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