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욱 박사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로크미디어)를 봤다. 정말, 정말 재미있게 봤다. 경제 초보도 금융 초보도 쉽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강추한다. 책의 전체 콘셉트는 ‘금융사’라기 보다는 ‘돈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 경제사다. 역사와 금융을 다루되, 책 전체에 홍춘욱 박사의 박학다식함이 녹아 있다.
특히 놀랐던 것은 ‘편집’의 힘이었다. 가독성과 대중성이 매우 뛰어나다. 기필코 베스트셀러로 만들겠다는 편집자의 집념(?)이 느껴질 정도다. 책의 편집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네 가지였다.
- 첫째, 사건당 5–6쪽으로 분량이 매우 짧다. 주간지 기사보다 약간 짧다. 쉽고, 빨리 읽힌다.
- 둘째, 50개의 사건을 다루며, 사건당 1개의 그래프-데이터를 보여준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책 전체의 ‘신뢰도’를 확 끌어올린다.
- 셋째,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다음 내용에 관한 ‘궁금증-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다음 장에서는”이라는 표현이 49번 등장한다. 신기하게도 이 표현이 등장하면, 정말로 다음 편이 궁금해진다.
- 넷째,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참고한 책을 소개한다. 볼만한 ‘좋은 책’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매우 유용한 팁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활용하는 마케팅 분야 베스트셀러인 『STICK 스틱!』(엘도라도)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질문 던지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돈의 역사』는 책 내용 전체에서 ‘질문 던지기’ 방법론을 전면적으로 적용한 사례에 해당한다. (나도 나중에 써먹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의 목차는 ① 지리상의 발견 직후, 대항해 시대 서유럽, ② 대항해 시대, 아시아(중국, 일본), ③ 중국이 아닌 영국(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한 이유, ④ 대공황, ⑤ 1971년 금본위제 붕괴 전후(브레튼우즈 체제 해체), ⑥ 일본 경제의 버블, ⑦ 한국경제, 해방 직후부터 1997년 외환위기 발생까지를 다룬다.
책 읽기 순서 관련해서, ‘사전 지식이 있는’ 부분부터 읽으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한다. 나는 ⑦ 한국경제 → ⑥ 일본경제 버블 → ④ 대공황 → ⑤ 71년 금본위제 붕괴 전후 → ③ 산업혁명 → ① 대항해 시대, 유럽 → ② 대항해 시대, 중국과 일본의 순서로 봤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매우 놀랍고 흥미로웠던 부분은 20세기 경제사의 중심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대공황 → 브레튼 우즈 체제의 성립 및 붕괴 → 70년대–80년대 인플레이션의 시대 → 일본 경제의 버블 발생과 붕괴 → 1997년 한국경제의 외환위기 과정을 금본위제와 통화 공급의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 연속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금본위제 해체가 대공황 시기 높은 실업률, 경기변동 주기, 인플레이션, 거시경제 관리와 어떤 관계인지 제대로 알았다. 아마도 20세기 경제사의 기본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이 부분에서 “와 그랬구나” 하면서 감탄했을 듯하다. 내용 전체가 매우 재밌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도표-그래프’를 중심으로 정리를 겸해 메모한다.
그래프를 보면 독일 다음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한 나라는 ‘러시아’이다. 1917년 레닌에 의해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다.
그래프를 보고 정말 놀랐다. 대공황 시기에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니.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념적, 청산주의자들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1929년 대공황 직전의 미국을 ‘버블과 사치’가 넘치는 비윤리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이러한 주식 버블과 사치를 ‘청산하기 위해서’ 금리 인하를 반대하는 입장이 Fed 내에서도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청산주의자들의 구호가 인상적이다.
노동을 청산하자, 주식을 청산하자, 농부를 청산하자, 부동산을 청산하자.
- 185–196쪽
한국에서 ‘부동산 대폭락’을 주장하던 일부의 사람들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미국의 대공황 시기 관련, 새롭게 안 또 다른 사실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가 1937년에 ‘재정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재정 지출 축소를 했다는 점이다. 대공황 이전 시기에, 당시 좌파/우파를 막론하고 ‘건전재정 이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공황이 한참이던 1937년에 재정지출 축소까지를 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거시경제학 교과서는 통화주의자와 케인즈주의자의 논쟁을 다룬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적극적 재정 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게 그간의 통설(?)이었다. 1929년 주식시장 폭락 이후 대공황이 특히 길었던 이유, 금본위제 시스템의 특징, 통화 정책의 중요성을 다루는 『돈의 역사』는 (케인즈주의적 재정 정책보다) 통화 정책이 더 결정적이었음을 입증한다.
참고로 세계 정치사에서 ‘적극적 재정 정책’을 제일 먼저 사용한 곳은 1932년 스웨덴 사민당이고, 이를 주도한 사람이 사민당 좌파이자 (공부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였다. 마르크스 이론 중에는 노동계급 궁핍화 테제와 과소소비 공황론이 있다. 비그포르스는 192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케인즈의 팸플릿을 접한다.
비그포르스는 케인즈의 유효수요 부족이론이 마르크스의 과소소비 공황론과 유사하면서도, 훨씬 더 세련되었다는 생각으로 케인즈 이론을 독학한다. 그리고, 스웨덴 사민당 기관지인 티덴(Tiden)에 연재한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스웨덴에서도 실업률이 급증한다. 1932년 스웨덴 총선이 있었는데, 이때 스웨덴 사민당은 세계 최초로,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 정책인 ‘적자재정을 통한, 공공일자리 창출’ 공약을 비그포르스가 주도한다. 비그포르스는 당시 처음 도입된 ‘라디오 토론’에 직접 출연해서 상대 정당을 제압하고, 스웨덴 사민당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주류 경제학의 최신동향, (마르스크주의) 정치경제학, 선거공학을 넘나드는 스웨덴 사민당의 정책적 내공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외에도, 스웨덴 사민당은 경제학, 정치경제학, 유권자연합, 경제성장 전략, 산업구조 고도화를 동시에 충족하는 정책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참고로 1920년대–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과 비그포르스의 활약상을 보고 싶은 분은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미야모토 타로의 『복지 국가 전략: 스웨덴 모델의 정치경제학』(논형),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후마니타스)을 추천한다.
‘금 보유량’과 연동된 금본위제 아래서는 ‘경기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적극적 통화 정책이 불가능하다. 금본위제를 이탈해야만,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개입이 가능해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2014년–2016년 기간, 유럽연합은 통화공급을 축소하고, 미국은 통화공급을 계속 늘린다. 2014년–2018년 기간 동안 미국의 성장률은 2.3%이고, 유럽은 1.2%였는데, ‘통화 공급’에 대한 정책적 차이가 성장률의 차이를 낳았다(고 홍춘욱 박사는 본다).
미국 경제분석국(NBER)은 GDP가 2분기 이상 연속 감소한 경우를 ‘불황’으로 본다. 1854년–2009년 사이에 총 33번의 경기순환이 있었다고 본다. 금본위제가 전형적으로 작동하던 1854년–1919년의 경우, 경기순환의 지속기간이 평균 48.2개월이었다. 반면 금본위제가 완화된 시기인 1945년–2009년의 경우 69.5개월이다.
금본위제 해체가 경기변동 주기를 늘리는 이유는 중앙은행과 정부의 개입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은 금리 조절과 채권매입을 통해 통화공급을 조절할 수 있고, 중앙정부는 재정 정책을 펼 수 있다. (221–255쪽)
과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쓴 책들을 보면 ‘볼커 쇼크’를 신자유주의와 주주 자본주의의 기원쯤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볼커가 무리하면서까지 고금리 정책을 감행했던 이유가 금본위제 해체 이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아, 달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
한국에서 일본의 부동산 버블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한국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구축소, 고령화, 성장률 둔화 등을 이야기하며 한국도 일본처럼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객들이 많다. 그런 사람을 접하면 십중팔구 ‘불안 조장 장사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히려 일본이야말로 세계적으로도, 아주 아주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 정부가 ‘제조업-수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점으로 안다. 위 그래프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하기 이전인 1950년대 후반부터 농업 분야 성장률이 상승했음을 보여준다(황금색 선).
1954년–1963년 기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은 6.0%였다. 같은 기간 농림어업 경제성장률은 평균 5.1%였다.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경제성장 차이를 분석한 『아시아의 힘』(프롬북스, 조 스터드웰)에서 ‘농지개혁’ 파트에 나오는 내용을 ‘그래프’를 통해 간명하게 입증한다.
1972년 8.3조치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대기업의 사채를 동결시켜준 것이었다. 심지어 대기업조차 ‘명동 사채’를 쓰던 시절이다. 결국 대기업에게 제조업-수출의 인센티브는 사채 이자와 무역 금융의 ‘격차’ 만큼에 해당했다.
금융(돈)의 관점에서 경제사를 해석하고 금융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하는 책은 적다. 일단 그런 ‘내공’을 가진 저자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독성이 높고, 대중적으로 읽기 쉽고, 적절한 논거-데이터를 제시하는 책은 더더욱 흔치 않다. 아마도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는 금융으로 보는, 경제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스테디셀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진심으로 추천한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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