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어릴 때부터 실용적인 것을 형식적인 것보다 좋아했다. 결과를 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을 좋아했고, 형식적인 것으로 보내는 시간을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학교 조회, 훈시 말씀, 국민 의례, 예배 등의 종교 집회도 피하거나 딴짓할 것들을 찾았다. 사업을 처음 하던 20대에는 대기업의 의전 문화를 보며 세상에 저런 쓸데없는 일을 하다니 정말 형식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규모 행사의 자리 배치·도착 시간·연설순서 등으로 신경전을 벌인다는 사실에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것을. 환경은 기후 변화뿐 아니라, 물리적 환경과 문화적 환경, 심리적 환경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수십 년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그 형식은 그런 환경을 효과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2.
행동경제학의 스타 형제 교수 칩 히스와 댄 히스는 『스위치』에서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대생의 비결은 밥그릇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었고, 영화관의 팝콘 통 크기를 크게 주든 작게 주든 관객은 대부분 한 통을 다 소비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넛지』(리처드 탈러)’에서 나오는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의 사례는 남자 화장실 소변기 중앙에 파리 그림 스티커를 붙여놓는 것만으로 소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을 80%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 짧은 식견으로 폄하하던 종교 단체의 활동은 매주 서로의 관계와 신의 가르침을 전쟁, 전염병, 박해의 상황에서도 공고하게 만들던 최고의 행사였고, 행사의 자리 배치는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으며, 연설 순서는 청중에게 뜻과 영향력을 전달하는 핵심이었다. 마찬가지로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출시 전에 표지를 보장해주는 언론의 인터뷰를 우선적으로 했고, 컴퓨터 완제품 박스에 항상 붙어있는 인텔 인사이드 스티커는 그 어떤 마케팅보다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2018년 잡코리아에서 2030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장 선호하는 회사 위치는 도심의 지하철역 인근으로 나타났고,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상사와 먼 자리 및 안쪽 구석자리로 응답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환경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런데 과거의 형식은 그 당시에 고안된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며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삐그덕거리는 부분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게 된다. 과거에는 문의 넓이 표준이 가로 60센티미터였지만 오늘날에는 80센티미터이고, 자동차의 대형화에 따라 도로의 넓이는 상대적으로 좁아졌으며, 주방의 싱크대는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 커짐에 따라 예전의 낮은 높이가 불편하게 되었다. 최소한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시작된 명절 제도는 이제 불편과 체증의 부작용을 앓고 있고, 모바일 세대의 눈높이에 서면 결재를 고수하는 회사의 체계는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혹은 조직을 바꾸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입체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보는 것이다. 현재 나는 어떤 형식과 습관에 지배되고 있는지, 내 삶의 가치와 방향에 비추어봤을 때 아직도 바람직한 것인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침반 없이 정처 없이 밀려다니는 조각배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회사를 운영할 때도 ‘우리의 사업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가’라는 피터 드러커의 조언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형식을 만들어가면 작은 노력으로 변화가 발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사 가치에 대한 우수 사원의 시상, 강조하고 싶은 정책과 문화의 포스터 부착 등은 조직의 변화를 만들어간다. 그런 게 없이 구전으로만 강조될 경우 사람마다 다른 소리를 하는 현상을 금세 볼 수 있다.
양치를 하고 나면 치실을 하는 습관을 붙이면 1분 내외의 시간에 잇몸질환과 입 냄새를 예방할 수 있다. 유산소나 달리기를 정기적으로 하는 습관은 두뇌훈련게임보다 높은 뇌 신경세포 활성화 효과를 일으켜 기억력과 인지력이 발달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템플릿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환경의 힘은 위대해서 예비군복을 입고 모이면 모범생도 삐딱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회의록의 형식과 회의 테이블의 모양을 변화시키면 다른 분위기의 회의를 접할 수 있다. 손목에 붙은 스티커 하나로 아이언맨으로 변신한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실용적인 활동은 원하는 일을 가장 적은 투자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설계였다.
3.
우리는 지금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만나는 사람, 일하는 곳, 매일 하는 생각의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바꾸면 좀 더 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가장 효과가 크지만 나 스스로만 할 수 있는 변화는 심리적 환경의 변화다. 버스를 놓치는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왜 나에게만 늘 이런 일이 생기는지 나는 왜 일찍 안 나왔는지로 세상을 탓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반면, 누군가는 날씨도 좋은데 걷기 좋다고 생각한다. 같은 일도 스스로 만든 심리적 환경의 변화는 다르게 해석하게 한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참상을 목도하고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진정한 자유란 견딜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환경에 어떻게 자유롭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환경을 구축하면 변화는 생각보다 쉽게 체화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처음엔 걷기도 어려워 기어 다니지만, 걷고 뛰는 즐거움과 편리함을 알게 되면 어떤 아기도 더이상 기어 다니지 않는다. 형식은 실용의 결정체이고, 실용은 형식의 이유가 된다.
원문: 손종수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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