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고소한 빵의 향기가 매장을 넘어 골목까지 퍼져 나간다. 이른 시간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매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대부분의 빵은 3층 제빵실에서 만들어지지만 이곳의 대표적인 메뉴 ‘튀김 소보로’는 매장 한편, 손님들에게 공개된 코너에서 직접 튀겨져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루 2만여 개의 빵을 생산한다는 성심당 대전 본점, 8시를 좀 넘어서면 어느새 매장 안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분주해진다.
이곳을 찾는 사람 중 상당수는 관광객들, 전국 어느 도시에도 없는 빵집, 대전에 와야 만날 수 있는 빵집이라는 인식 덕분에 성심당은 어느새 대전 관광 코스 중의 한 곳이 됐다. 전국 각지, 유수의 백화점에서도 입점 요청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대전 시민들이 사랑하는 빵집’으로 대전을 지킨 성심당의 선택은 성공했다.
그런데 모두가 사랑하는 빵집 성심당의 탄생이 ‘메러디스 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성심당의 창업주 임길순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그곳에서 사과농장을 했던 40대의 가장 임길순은 함흥 지역 1세대 가톨릭교도였다. 흥남과 원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신부들이 선교해 탄탄한 가톨릭의 기반을 가진 도시로 1950년 당시에는 57개의 성당이 있을 정도였다.
임길순은 그 지역에서도 규모가 큰 덕원 수도원의 성당을 다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덕원 수도원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마리너스 수사가 평생 머물렀던 미국 뉴튼 수도원이 지원하던 성당 중의 한 곳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덕원 수도원과 마리너스 수사, 뉴욕 뉴튼 수도원과 경북 왜관 수도원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신비한 인연으로 엮이게 된다.
광복 이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종교에 무척 배타적이었다. 종교 탄압도 갈수록 심해졌다. 흥남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임길순의 장녀 임정숙(84)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초등학교 안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성당에 다니는 애들을 흰둥이라고 부르며 놀렸죠. 아무리 똑똑해도 발표도 시켜주지 않고 학교 임원도 시켜주지 않았고 불이익을 많이 줬어요.
1950년 10월 연합군이 흥남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2월에 접어들면서 난데없는 연합군 철수 소식이 전해졌다. 또다시 받게 될 신앙의 박해를 염려한 임길순은 피난을 결심한다. 성당의 리더격이었던 임길순은 같은 성당의 가톨릭 성도들 200여 명을 이끌고 함께 피난길에 나선다. 무작정 도착한 흥남부두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사람들로 빽빽했다. 임길순의 장녀 임정숙의 증언이다.
서호 해수욕장은 바다가 고운 해수욕장이었어요. 그런데 모래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요. 말도 못 하죠.
그러나 배의 숫자는 부족했고 언제 배를 탈 수 있을지 기약을 할 수 없었다. 임길순의 무리와 함께 있던 2명의 젊은 신부가 아이디어를 냈다. 흰 천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높은 나뭇가지 위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매일 그 십자가를 높이 들고 흥남부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그 깃발을 본 미군이 다가와 임길순을 비롯한 성당 식구들을 안내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임길순은 그때 그 배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살아나 목숨을 이어가게 된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임길순은 평생 그 기도를 기억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배는 사흘 만에 무사히 거제도에 닿았다. 그러나 곧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이 떠나온 피난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거제도에서 잡아 온 생대구를 사서 국을 끓여 파는 장사를 하며 겨우 연명했다. 그러나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자 진해로 이사를 했다가 다시 서울로 갈 결심을 한다. 어느새 자식들도 더 태어나 가족은 7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임길순은 막 개통을 한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차가 대전에서 고장이 나 멈춰 버렸다. 기차가 고쳐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임길순은 가족을 데리고 가까운 성당을 찾아간다. 그곳이 바로 대전 대흥동 성당이었다.
성당에서는 진해에서 올라온 가난한 피난민 임길순에게 구호물자인 밀가루 두 포대를 나눠 주었다. 일단 끼니라도 좀 연명하라는 뜻에서 나눠 준 것이었다. 임길순의 아내 한순덕은 밀가루 두 포대를 먹고 나면 또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아이디어를 낸다.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장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다. 일단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대전 노점에서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전역도 앉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볐어요. 결국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거기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놀라운 것은 그 노점에서 장사하면서도 가게 명패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성심당’이었다.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는 ‘성심’을 빵집 이름으로 정한 ‘성심당’은 그렇게 대전역에서 노점 장사를 하면서 출발했다. 초창기는 모든 것이 녹록지 않았다. 장사를 하고 돌아오면 또 다음날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 힘들고 빠듯한 생활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임길순은 배에서의 약속을 기억하고 실천했다.
노점에서 창업한 뒤 10년쯤 지난 뒤 처음으로 가게를 얻어 문을 연 성심당
주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 거리를 찾아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난리 통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 성당에는 장례를 치를 일이 많았다. 그러나 변변한 장례 절차를 갖추기는 어려웠다. 임길순은 장례가 있을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시신을 염하는 일을 직접 했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그 일을 그는 그 후 수십 년간 봉사했다. 남은 빵들을 주위에 나눠준 것은 물론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돌본 일들을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다.
어느 겨울인데 아버지가 아주 추워하시면서 들어와서 내복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아버지, 내복 안 입고 가셨어요? 하고 내복을 내어 드렸죠. 그랬더니 글쎄, 자신이 입고 계시던 내복을 거지가 너무 추워 떨길래 벗어주고 오셨다는 거예요.
- 큰딸 임정숙 씨가 기억하는 어느 하루
대흥동 성당은 100주년을 기념하며 작은 성당 종을 만들어 종탑에 매달 때 거기에 임길순의 이름을 새겼다. 그가 성당에서 한 봉사들을 기억하겠다는 의미였다.
임길순의 정신은 2대 사장 임영진이 이끌어가는 지금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버지처럼 말없이, 작다면 작은,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없는 나눔을 계속한다. 현재 성심당 맞은편 골목에는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다. 떡볶이, 어묵, 꼬치 등을 파는 포장마차 10여 개가 들어서 있다.
처음에는 물이 귀해서 장사하기 너무 어려웠어요. 집에서 물 한 동이 이고 오면 씻고, 음식하고 하면 금방 다 써 버려. 그러면 또 물을 가지러 집까지 가야 해, 그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수도를 좀 쓰자고 했더니 선뜻 그러라고 하셨어.
- 이곳에서 장사를 44년째 하는 유화선 씨의 증언
성심당은 아예 건물 밖으로 수도를 하나 내어주었다.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모든 포장마차가 이 수도를 이용한다. 덕분에 재미난 풍경도 연출된다. 이제는 직원 500명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한 성심당이 가끔 야유회라도 가면 주변 포장마차에서 협찬을 한다. 버스에 떡볶이며 순대, 꼬치를 실어주는 것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따뜻한 공존이 성심당 스트리트(성심당을 주변으로 한 거리)를 특별하게 보이게 한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 따뜻한 한 마디가 성심당의 사훈이다. 성심당의 2대 사장 임영진 씨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운동인 ‘포콜라레 운동’에 동참한다. 자본주의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업이 바뀌어야 하고 기업이 바뀌려면 기업을 운영하면 기업가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포콜라레 운동’에 동참하면서 여러 가지 실천에 앞장선다. 100% 정직한 납세를 기업가의 기본자세로 삼을 뿐 아니라 한해 발생하는 기업 이윤의 15%를 직원에게 돌려주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매달 3,000만 원 이상의 빵을 어려운 이웃에 기부한다.
경쟁이 아닌 상생, 독점이 아닌 나눔을 목표로 운영되는 빵집, 이 빵집이 대전 시민 모두가 사랑하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는 창업주 임길순 씨가 메러디스 호에서 한 간절한 기도에 있다. 큰딸 임정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성심당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성장을 한 1990년대 초, 부모님이 미국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돌아온 아버지가 뉴튼 수도원에서 메러디스호 선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글쎄, 보니까 그분이 맞아. 옛날 그 배의 선장님, 성당 수위를 하고 있더라고. 말이 안 통했지만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했지.
어느 지역이든 여행을 가면 항상 수도원이나 성당을 먼저 찾아갔다는 임길순 씨는 뉴저지에 갔을 때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찾았다. 실제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은 오랫동안 수도원의 선물의 집 격인 ‘성물방’을 지키면서 일종의 수위 역할을 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어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자신이 그 배를 타고 온 사람이라 밝히자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40년의 세월을 넘어 미국의 한 수도원에서 만난 옛 선장과 피난민의 만남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해 직원 500여 명을 둔 빵집으로 성장한 기적의 빵집, 나아가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업의 모델을 제시하는 성심당의 뿌리가 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의 항해에 있다는 사실은 새삼 인간은 미처 짐작할 수 없는 오묘한 삶의 신비를 깨닫게 한다.
내가 심는 한 알의 밀알이 나중에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인간의 도리란 그저 한 알의 밀알을 심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심당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뿌린 밀알 가운데 하나가 맺은 열매 중의 하나이다.
원문: 미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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