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연속 순댓국을 먹었다. 내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서너 명씩 손님이 방문한다. 그때마다 점심을 대접하는데 이곳처럼 가성비 넘치는 맛집을 근처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강남역과 선릉역을 잇는 테헤란로와 시청 앞 북창동 인근에 근무하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그 명성을 듣거나 시식을 해봤을 법하다.
주당들 사이에서 이곳은 ‘해장의 성지’로 불린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백암농민순대(이하 ‘백농순’). 그래서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이 집 메뉴를 수시로 배 속에 채운다.
웨이팅 기본 30분, 기다리지만 기다리지 않는 이유
백농순은 매일 오전 11시 10분부터 점심 판매를 시작한다. 평일은 보통 10시 반부터 손님이 줄을 서는데,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현관 앞에 비치된 대기명단에 이름과 인원수를 적는 것이다. 대기명단이 적힌 보드에는 ‘김 3’, ‘최 2’, ‘박 4’ 등의 방식으로 성씨와 몇 명인지를 기록한다. 시작과 동시에 10여 분 만에 대기 순번이 꽉 찬다.
흥미로운 건 대기명단에 성씨가 아닌 ‘K3’ ‘P4’ 등 영어 이니셜을 쓰거나 ‘용’ ‘환’ ‘결’ 등 이름 끝글자를 적는 경우다. 주로 ‘김’ ‘이’ ‘박’ 등 비슷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끼리 호출 순서가 헷갈릴까 봐 혜안을 내놓은 창의적인 발상이다. 가게에서 그 어떤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손님들이 스스로 알아서 최적화 방안을 찾아낸 것이다. 한자(漢字)로 표기한 경우도 있는데, 이때마다 매장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 방법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매장 직원을 대표하는 매니저는 대기판 순서에 따라 손님을 응대한다. 손님이 일찍 도착했다고 해서 먼저 테이블에 앉히지 않는다. 대기판에 ‘이름을 적고’ → ‘호출을 하고’ → ‘인원을 확인한 후’ → ‘지정된 좌석 배치’ 하는 차례에 따라 손님을 안내한다.
자리를 배정받았다고 바로 음식을 주문할 수도 없다. 대기 손님이 매장을 꽉 채운 이후 입장 순서에 따라 주문을 받는다. ‘보통 순댓국 1, 순대만 순댓국 1’, ‘정식 3’, ‘보통 2, 특대 1, 순대만 1’ 등 테이블마다 주문은 제각각이다. 그 과정이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해 보이지만 매장 직원은 침착하게 받아 적는다. 다소 불편하고 인내심을 필요로 하지만 손님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이 상황을 빠르게 수긍한다.
주문 담당 직원은 한 명이다. 그 직원이 주방을 향해 오더를 내리면 홀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복명복창한다. 그리고 주방은 카운터 포스에 찍힌 주문에 따라 일사천리로 음식 조리에 들어간다.
십오 평 남짓의 홀 공간에 직원은 너덧 명이지만 각자 역할은 서로 다르다. 자리를 안내하는 직원, 주문을 받는 직원, 음식 서빙을 하는 직원(차리고 또 치우고),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 그리고 깍두기와 부추, 풋고추 등 반찬을 리필해주는 직원 등 할 일은 명확하게 분업화돼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문을 받은 직원이 홀에 입장한 손님들의 1차 주문 접수를 마친 후, 인공위성처럼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부족한 밑반찬을 챙겼다.
손님이 반찬 추가를 일일이 부탁하지 않아도 적시에 알아서 채워주니 이용 만족도가 매우 높다. 어느 정도냐면 이 집 반찬 리필 서비스를 칭찬하는 손님들이 서로서로 웅성웅성 미담처럼 오가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가히 서비스의 백미(白眉)다. 점심 웨이팅 시간만 기본 30분, 그렇지만 손님은 그 이상의 보상을 받는다.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은 셈이다.
사이렌오더? 아니 대기오더! 수요예측의 정수를 찾다.
맛집 포스팅을 기대했다면 이 글을 더 읽지 말길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백농순은 현재 선릉 본점과 강남역점, 시청점 모두 세 곳을 운영 중이다. 손님이 미어터지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매장을 공격적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있었는데, 바로 선릉 본점에 신관을 새롭게 오픈한 것이다. 이 지역 고객들은 환호했다. 물론 그렇다고 점심 식사 대기의 수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고충이 이전보다 덜하다는 정도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이 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영업 시작인 오전 11시 10분부터 마감인 오후 9시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참고로 백농순은 영업시간 내 브레이크 타임이 없다.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식당이 문을 닫고 영업손실을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궁금했다. 백농순은 북새통 속에서도 과연 어떻게 수많은 손님의 서로 다른 주문내용을 빠르고 정확하게 응대할 수 있을까? 대기는 했어도 손님이 기다리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이 집의 비결은 대체 무엇일까?
첫째, 대기자 명단에 주문정보가 숨겨져 있다.
스타벅스의 사이렌오더는 잘 알려졌다시피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방문할 매장을 지정하고 음료를 사전에 주문하는 방법이다. 손님은 매장 내 주문과 결제 대기부터 음료 제조에 걸리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이외에도 회사는 매장 내 체류 시간을 줄여 효율화를 높이고, 적립금 등 자동결제 시스템을 활용한 금융 수익도 창출한다.
백농순의 대기오더는 사이렌오더와 많이 닮았다. 스타벅스처럼 그럴싸한 IT시스템을 갖추지 않았지만, 대기자 명단 작성이라는 아날로그 방식을 통해 음식 주문에 대한 수요예측의 정확성을 높인다. 성씨와 인원수로 순댓국 주문 개수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데, 홀과 주방은 이 정보를 기준으로 음식과 테이블 세팅을 준비하게 된다.
더 유심히 살펴보면 메뉴판에도 수요예측의 정확성을 높이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메뉴를 관통하는 메뉴 구성의 공통점은 순댓국이라는 점이다. ‘일반’, ‘특대’, ‘순대만’, ‘정식’ 등 각각의 다른 메뉴처럼 보이지만 그 기본은 순댓국의 기본이 되는 육수와 양념이다. 여기에 주문에 따라 재료를 어떻게 넣을지, 더 많이 넣을지를 최종 결정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다.
둘째, 매장 운영에만 집중, 비효율을 없애라.
백농순은 매장 운영에 최적화된 주문 방식과 공급 프로세스를 갖췄다. 그 흔한 배달 서비스도 시행하지 않는다. 다만 현장을 찾은 고객에 한해서 포장 판매를 제공한다. 백농순 직원에게 배달 서비스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글쎄요?” 분석은 다양할 수 있겠으나 사실 매장 판매량만 해도 특별히 배달 욕심을 낼 이유가 있을까 싶다. 배달 서비스를 제공할 순 있겠으나 그 순간 매장의 질서는 뒤죽박죽 엉킬 것이 뻔해 보였다.
또 색다른 점은 저녁 인기 메뉴이자 가격이 가장 비싼 돼지수육은 점심과 저녁을 나눠 하루에 한정된 물량만 판매한다는 것이다. 하루에 수십 개 정도로 제한하는데, 이는 신선하고 질 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객단가 높은 메뉴의 빠른 소진을 유도하는 이 집만의 차별화 전략으로 보였다.
순댓국을 먹으면서 IT 시스템 없이 일평균 6만 5,000개의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본 도시락 업체 ‘타마고야’의 성공사례가 떠올랐다. 민정웅 인하대학교 물류 대학원 교수는 그의 저서 『미친 SCM이 성공한다』에서 타마고야의 SCM 성공 사례를 자세히 설명한다. 인터넷 주문이 아닌, 전화와 팩스로 주문을 받고 AI가 아닌 직원이 직접 수요를 예측하면서 타마고야는 어떻게 오배송 0%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까?
민 교수는 “타마고야는 일정 수요를 유지 및 예측할 수 있기 위해 개인 도시락이 아닌 회사나 단체 주문이 가능한 고객을 타깃으로 잡았다”며 “또 일회용 도시락 용기가 아닌 재활용 용기를 사용해 도시락 수거 시 채집되는 고객의 반응이나 정보를 수요예측에 반영하는 나름의 방식을 채택했다”고 설명한다.
백농순은 주문부터 제조(조리), 판매(서빙)까지 매장 내에서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SCM(Supply Chain Management) 질서를 따랐다. 대기자 명단을 활용해 주문할 메뉴와 수량을 예측했고, 배달이 아닌 매장 운영에 집중하면서 빠르고, 정확한 홀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의 만족도 향상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고객들은 대기 시간이라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음식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아날로그 방식을 취한 타마고야처럼 백농순의 SCM 방법론도 그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SCM은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기업마다 환경에 따라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철학이 있을 뿐이라고…. 순댓국집에서 SCM을 보았다.
원문: 김철민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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