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어렸을 적부터 항상 행복에 관심이 컸다. 누군가 ‘너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라고 물으면, 항상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고 막연하게 행복한 삶을 꿈꿨다. 행복은 나에게 절대 선이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마땅히 추구할 권리. 고등학교 시절 윤리 교과서에서 만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했고, 나는 그가 주장한 목적론적 삶에 매료되었다. 행복은 실체가 없었지만, 삶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매일 행복한 경험을 자주 하려고 한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닌 도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주, 문득 5년 전 읽었던 책 『행복의 기원』을 다시 펼쳐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내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목적론에 빠져있던 무렵, 우리는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던 책.
저자 서은국 교수는 30년 동안 행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권위 있는 학자다. 저자는 진화론에 입각해 인간은 궁극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행복감은 일종의 쾌감인데, 긍정적 정서는 우리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했다는 신호다. 그리고 이 행복감은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잘 맺을 때 발생한다.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를 지어 살아남았고, 우리는 그들의 자손이다.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고, 결국 생존과 번식을 위해, 타인과 관계를 잘 맺어야 했다. 이때 일종의 부산물 행복감이라고 우리가 이름을 붙인 신호가 발생한다. 저자는 진화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실험 결과 및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행복의 결정적 열쇠는 일상에서 맺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달려있다고도 주장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사람 때문에 살아가는구나.
한국에서 행복한 비결?
한국에 왜 돌아오셨어요?
지난주 스웨덴 유학 설명회에서 만난 한 참가자는 나에게 그토록 이민 가고 싶어 했던 북유럽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물었다.
제가 살고 싶은 삶을 실천하고 싶어서요. 우선 제게는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스웨덴에서 배운 것을 한국에 나눌 목적으로 유학을 갔는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있는 게 더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답했지만, 당시에는 잘한 결정인지 확실치 않았다. 나는 스웨덴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성 평등한 육아휴직, 무상 교육 등 잘 갖춰진 복지제도 때문이라 생각했고, 스웨덴을 떠난다는 것은 이 시스템에 속할 기회를 버리고 무한 경쟁 사회인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용기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한국에 도착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아닌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살지만, 나는 스웨덴에서 행복했던 만큼 행복하다. 2년 만에 한국 사회가 크게 변한 것도, 내 삶이 안정된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행복의 기준인 직장이나 돈에 관해서는 나는 꼴찌일지도. 한 번의 퇴사, 8개월간의 취업 준비를 거쳐 31살이 되어서야 신입 사원이 되었으니. 하지만 스웨덴에서 돌아온 후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뻔하디뻔한 말이지만 행복의 핵심은 나다운 삶과 내 사람들과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데 있었다. 책에서 저자는 개인주의는 행복을 증대시키는 문화적 특성이라고 했다. ‘행복의 기원’식으로 말하면 나는 사회적 관계를 잘 맺고, 내 소신껏 긍정적 선택을 했기에 행복감을 ‘느낀 것’이다. 내가 추구하진 않았지만 느껴진 쾌감. 잘 포장하면 가족주의자, 센스 있는 개인주의자가 된 덕분이고 엄마 식으로 말하면 유별난 덕분이다.
구체적인 행복의 경험
귀국 후, 약 10년 만에 1년 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다. 퇴근 후나 주말에 엄마와 함께 하는 서울 구경, 나눠 먹는 치맥이 행복이었다. 연애하는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저녁, 달리기, 사이클링 등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다. 엄마나 친한 친구들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하고, 내 사람들끼리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행복이다. 별거 아닌 일상에 행복은 깃들어 있었다. 행복감은 내가 잘 먹고 잘사는 일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
책에서 저자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행복의 원동력은 복지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 돈이나 사회적 지위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 덕분이다. 이 구절을 읽자마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저자가 옳았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 매일매일 지켜지는 곳. 이런 문화가 우수한 복지제도를 만들었고, 제도는 문화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약 3년 전, 귀국을 결심하고 나서 쓴 브런치 글에 ‘스웨덴 사람들이 스웨덴에서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게 아니었다’라고 적은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다.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 떠난 내가 한국에서 사는 지금 행복한 이유, 어디에 살든 행복은 머리로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자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행복을 경험하고 있을까? 저자는 한국인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 행복감의 빈곤을 느끼는 이유를 건강한 사회적 관계의 결핍에서 찾는다. 집단주의 문화 안에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며, 공동체 생활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해왔다. 물질주의 사회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행복의 기준이 되었고, 가족과의 저녁 식사 대신 야근이나 회식은 당연하게 여겨질 때도 흔하다. 내 삶에 대한 평가를 타인에게 던져버린 것뿐만 아니라, 행복감을 분출하는 건강한 사회적 관계도 없으니, 삶이 메마를 수밖에.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불행한 건 아니었지만 딱히 행복하지도 않았다. 대신 마음은 늘 불안했다. ‘좋은 고등학교를 갈 수 있을까? 에서 시작된 레이스는 좋은 대학, 좋은 기업을 갈 수 있을까?’로 이어졌다. 스스로 좋음에 대한 정의도 부족했지만, 대부분 좋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있었다. 나이가 들자 이 기준은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서 애 낳고 잘 살면 된다는 주변의 기대로 확대되었다. 한국에서 규정하는 ‘좋은 것’은 대부분 타인이 인정하는 명성이나 부에 관련된 것이었다.
내 삶의 평가를 타인에게 맡겨버린 삶. 그리고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획일화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삶. 주변 사람을 다 경쟁자로 보는데 어떻게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가 있을까. 나도 그랬다. 때문에 스웨덴에 가기 전 한국에 살던 나는 떠나고 싶었다. 모두가 삶을 피라미드로 보니, 삶을 피라미드가 아닌 텅 빈 캔버스로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채워가야 하는.
우리는 언제 삶을 피라미드로 보지 않을까? 삶,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는 생존 경쟁에서 누구나 자유롭지 않다. 이 경쟁에서 떨어지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때문에 낙오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복지국가 북유럽 스웨덴 정착을 꿈꿨다. 이는 행복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는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행복은 내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었다. 나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는 노력.
개인의 노오오오오오오력으로 건물주가 될 수는 없지만, 오늘 내 하루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경험을 할 수는 있으니까. 그게 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길이자, 잘 먹고 잘사는 일이다. 내가 배우고 온전히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표현하며, 가족에게, 남자친구에게 생각나는 사람에게 전화나 카카오톡을 한 통 더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고 함께 걷는 요즘 나는 행복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원문: 검은머리 왜국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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