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책은 ‘비꽃’ 출판사에서 펴내고, 김옥수 선생님이 번역한 「크리스마스 캐럴」(2016)을 추천합니다. 몇 개의 번역본을 골라 들고 처음 몇 페이지를 비교해 읽어보다가 이걸로 구매해 읽었습니다. 번역이 정말 훌륭해요. 감사합니다!
- 미국 래퍼 구찌 메인(Gucci Mane)의 믹스테이프 〈East Atlanta Santa 3〉(2019)의 인트로이자 끔찍한 크리스마스 테마 랩송 ‘Jingle Bales Intro’를 듣고 나서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어보세요. 그리고 스크루지를 찾아온 유령들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소설이 더 생생하고 재밌어질 겁니다. 물론 가사는 연관성이 전혀 없을뿐더러 아주 형편없습니다. 곡 분위기만 가져가세요.
2020년 11월 6일 금요일. 더는 놀라울 것도 없는 독수공방 크리스마스를 49일 앞둔 날.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띵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찬찬히 뜯어 읽었다. 누가 볼까 몰래 먹는 동네 슈퍼 막대 아이스크림의 클래식 ‘누가바’처럼 이런 내 궁상을 누가 보고 흉볼까 봐 몰래 숨어서 읽었다. 눈물도 때로 훔치면서. 또르르.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주인공 ‘스크루지’ 때문에 가장 유명하다. 넉넉잡아 20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인품의 돈 안 쓰는 짠돌이 이미지를 독점하다시피 한 할배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회계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결국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못된 스크루지만 기억하고 그의 과거만 이용해먹는다. 소설을 안 읽었거나 읽다가 덮었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았거나 혹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스크루지는 ‘스크루지와 말리’라는 회계 사무실의 사장이다. 말리는 스크루지처럼 돈만 밝히며 인색하게 굴던 동업자였는데, 7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죽었다.
소설의 초반부, 스크루지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부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쓸데없이 화가 나 있는 ‘미친 영감’으로 묘사된다. 반면 그의 조카는 인생의 긍정적이고 행복한 면에 시선을 두는 인물이다. 스크루지가 조카에게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주머니가 비어도 돈 쓸 일은 많은 시기, 나이는 한 살을 더 먹는데 돈은 한 시간도 못 버는 시기, 회계장부를 결산하면서
일 년 열두 달 적자난 항목만 잔뜩 확인하는 시기인데, 도대체 뭐가 좋단 말이냐?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해 기부를 부탁하고자 스크루지의 사무실에 방문한 두 신사, 그들의 이런 멘트는 오직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스크루지의 현재 모습과 맞물려 소설의 주제 의식을 분명히 한다.
저희가 이런 시기를 선택한 까닭은 부족한 건 뼈저리게 다가오고 풍요로운 건 넘치는 시절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일하는 서기, 그에게 행복을 빌어주러 찾아온 조카, 기부를 권하던 두 신사, 사무실의 열쇠 구멍 사이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던 어린아이에게 ‘떽’ 소리를 내며 저주를 퍼붓고 집으로 돌아온 별난 할배 스크루지, 그 하룻밤 사이에 4명의 유령이 차례로 그를 찾아와 모질게도 괴롭히는데 그것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동업하다 죽은 ‘말리’ 유령, 그를 과거로 데려가는 유령,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유령, 그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유령까지, 그들은 스크루지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말 그대로 못살게 군다. 반성 좀 하라고!
처음 맞닥뜨린 동업자 ‘말리’의 망령(첫 번째 유령)에겐 센 척하며 농담도 던져보는 스크루지, 하지만 그는 이내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굴복하고 무릎을 꿇는다. 제발 살려달라면서! 도대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면서! 사슬에 묶인 말리 유령은 자기처럼 ‘돈 사슬’에 묶여 정신없이 사는 스크루지에게 인생은 짧아도 이웃을 도울 방법은 무궁무진함을 강조한다.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선행을 다 하면서 살라고! 그러면 운명을 바꿀 기회와 희망이 있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영적으로 넓고 깊게 교류해야 하네. 살아생전에 못 그런 영혼은 죽은 다음에 이러는 벌을 받아. 아, 비통하고도 비통하구나! 살아생전이라면 서로 많은 걸 나누면서 행복을 누릴 터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나눌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보면서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구나!
이후 두 번째 유령, 그의 지난날을 그대로 보여주는 과거의 망령이 나타나 그를 과거로 데려간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해 음침한 교실에서 혼자 책을 읽는 외톨박이 소년의 모습을 보고 스크루지는 구슬피 운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스크루지 자신의 과거였으니 말이다. 그러고는 유령과 함께 스크루지는 자신의 청년, 장년 시절의 모습을 차례로 돌아본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과 마주한다. 그는 무척 괴로워하고 또 반성한다.
친구들은 크리스마스를 즐기려고 죄다 집으로 가는데 자신은 이번에도 외톨이로 남았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깨달았어.
- 소년 스크루지
당신은 숭고한 소망을 하나씩 잃다가 결국에는 제일 커다란 열정에, 돈벌이에, 완전히 빠져들었어. 아니야?
- 스크루지의 옛사랑
세 번째 유령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스크루지가 적극적으로 변한다. 이전 두 유령들에겐 비록 억지로 끌려다녔지만 배운 게 참 많다면서 자기를 ‘어디로든’ 데려가 달라며 부탁까지 한다. 세 번째 유령은 현재의 크리스마스 유령인데, 현재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현실을 긍정하며 행복을 찾고 그것을 가꿔나가는 모습을 스크루지에게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러던 중 현재 그를 열심히 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엿듣게 된다. 욕먹을만하지 뭐.
눈을 뜨건 잠을 자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 하루만큼은 서로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크리스마스 기분을 조금이나마 주고받았어.
질병과 슬픔도 전염이 잘 되지만 재미있는 말과 웃음처럼 전염이 잘되는 것 역시 없다는 사실을 보면 세상 이치가 정말 공평하고 숭고하고 정의롭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도 보고 멀리도 가고 여러 집을 돌아다녀도 언제나 결말은 행복하게 끝나.
마지막 네 번째 유령은 스크루지를 미래로 데려간다. 그의 종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죽었으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이용해먹으려 하고, 그를 실컷 욕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이 온 집안을 행복하게 할 정도다. 그는 절망하지만 반성하고, 끔찍한 운명을 바꿀 수 있길 절박한 심정으로 희망한다. 스크루지가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와우! 축하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일정한 결말을 예견하오. 똑같이 살아간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도중에 살아가는 모습을 바꾸면 결말도 변할 것이오. 유령님이 나한테 보여준 장면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해주시오! […]
세 분이 알려준 교훈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겠소. 아, 제발 부탁이니, 비석에 새긴 글씨를 지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오!
소설의 마지막 장, 스크루지는 새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에 불타서 가장 좋은 옷을 빼입고 낄낄 웃으며 평생 안 하던 일들을 마구 벌인다. 기부를 하고, 월급을 올려주고, 고마움을 표하고, 아이들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모두의 축복을 진심으로 빈다! 그야말로 해피엔딩.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건 자신한테 시간이 있다는, 그래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이야. 세상만사 무엇이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 산책을 비롯해 그 무엇으로도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꿈조차 못 꾼 거야.
그리고 소설의 끝에 도착한 나는 문단 하나에 마음을 크게 빼앗겼다. 그래, 스크루지처럼 어떻게든 바뀌기로 결심했다면, ‘처음’에 대한 두려움일랑 저 멀리 떨쳐내 보자며 연말의 나 자신을 타일렀다. 자, 가자!
세상 사람 일부는 스크루지가 변한 모습을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본인은 남이 비웃건 말건 개의치 않았어.
앞에 나선 사람이 처음에 조롱하는 분위기를 못 견디면 세상에 좋은 일은 영원히 안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런 비웃음을 못 본 척하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차라리 비웃기라도 해서 눈가에 주름을 잡으면 훨씬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그래서 마음이 편해. 스크루지는 그걸로 충분했지.
날씨는 추워지고 생각은 많아지는 계절, 겨울이다. 새삼스럽게라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하는 다 큰 어른들에게 고전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정말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이건 레알이다. 레알!
진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면, 무언가 빼먹은 채 쓸데없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하루에 세 번씩 성실히 배는 부르는데 마음은 텅 빈 듯 채워지지 않는 느낌으로 멍하니 앉거나 눕거나 걷고 있다면 오랜 시간이 검증한 소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2020년을 간지나게 마무리해보세요. 같이 간지 좀 납시다.
원문: 스눕피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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