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스 공장에서 시사인 기사를 인용하며 한국 사람이 방역에 성공한 인문학적 이유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라며, 서양은 한국의 이 독특한 개인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들으면 일리 있는데… 가만히 곱씹으면 칸트의 의무, “책임 있는 개인주의”와 별반 다를 것 없다. 지금 서양 방역이 무너진 이유는 이 ‘개인주의’ 자체가 무너졌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한국의 독특한 개인주의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개인주의를 지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냥 ‘의무의 개인주의’가 ‘끌림의 이기주의’로 돌아선 것일 뿐이다.
개인주의. 참으로 멋진 말이다. 한편으론 참 허황된 말이다. 꿈과 이상으로 삼긴 좋지만 현실에서 실현시키긴 참으로 어렵다. 한 개인이 개인주의로 살아간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며,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그냥 그 한 사람만 개인주의의 전설로 남을 뿐. 이런 점에서 서양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요 가치이자 근대의 핵심가치였던 개인주의를 내팽개친 것도 이해가 간다.
한국 사람이 방역을 잘 지켜온 이유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함께주의’ 때문이고, 이 ‘함께주의’가 있는 이유는 ‘한국말’의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에겐 너무 자연스럽게 ‘함께주의’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오늘 아침 책을 읽다가 이 함께주의를 설명할 좋은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공생’과 ‘공진화’이다. 한국말로 바꾸면 ‘더불어 살아감’이다. 이 태도가 바로 ‘함께주의’이다.
여기에 ‘개인’이나 ‘공동체’ 같은 단어가 들어갈 틈은 없다. 왜냐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처럼 따로 살아갈 생각이 없고, 공동체처럼 서로 같아질 생각도 없다. 그냥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각자가 각자와 더불어 사람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함께주의’다. 나는 뉴스공장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 자신을 설명할 말이 참으로 빈약하구나. 그래서 자꾸 남의 말을 빌리려 하는구나…
원문: 윤여경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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