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올해도 추석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또 어김없이 지나갔다. KTX 티켓팅, 귀성길 고속도로 감금, 전 부치기, 어르신들의 잔소리를 견뎌내고 다시 기약 없는 고속도로 귀경길로 이어지는 지옥 체험 콤보 세트를 견디느라 너무도 수고하셨다.
이 땅에 사는 이상 우리는 을 때까지 설날과 추석을 반복할 테다. 이러한 집단적 현타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교수님이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칼럼의 제목은 마치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순간적으로 유행어의 반열까지 올랐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 「추석이란 무엇인가」 中
그래, 한 번 따져보자. 추석이란 대체 무엇인가. 민족의 대명절이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인종, 문화, 언어, 역사 또는 종교와 같은 전통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인간 집단이라고 한다. 즉 거대한 공동체다. 그렇다면 결국 이 긴 질문의 끝에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 개인주의 시대에 공동체라니, 어감부터 벌써 낡은 느낌이다. 오늘날 공동체란 그저 개인을 구속하는 거추장스러운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때,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이 손을 들었다
2010년 한국에 ‘정의(正義)’ 열풍을 몰고 왔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이번에 새로 출간된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만나다』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중국 또한 물질적 고도성장 및 1인 자녀 정책에 따른 개인화를 지나 정신적인 공허라는 증상을 낳았다. 얇아진 공동체는 더 이상 개인들에게 현실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이때 중국인들의 마음에 샌댈의 ‘정의’는 다양한 부분에서 기여했다.
중국인들이 샌델의 정의론에 관심을 크게 갖게 된 연유는 중국 사회에 공공철학이 공허하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급성장하는 시장경제 속에서 중국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정치 이론과 도덕적 담론은 시장 기반 추론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 샌델의 정치철학은, 이러한 필요가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대중들이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그리고 더 효율적으로 인식하고 토론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110쪽
중국은 공자와 맹자를 필두로 한 유가 사상의 기원이며, 그들이 발전시킨 유교야말로 동아시아 문명의 공동체적 사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기존 중국의 학자들과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가지면서도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탐구하기에 적합한 철학자가 아닐 수 없다.
낡은 사상은 없다, 다만 기름칠이 필요할 뿐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만나다』는 오늘날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양철학의 한계점과 유가 철학의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완벽에 대한 반론』 등 샌델의 여러 저작에 대해 중국의 학자들이 유가 사상의 관점에서 논의를 덧대고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살찌운다.
이는 오늘날 시장만능주의의 팽배와 기술관료화 된 정치와 행정, 신뢰를 잃어가는 민주주의 시스템에 도덕적인 행동 규범으로 참고할 수 있다는 데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다.
[…] 이런 종류의 가치중립적 정치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주류 정치 담론에서 보이는 도덕적 공허가 진공 상태를 만들어 내어 종교적 근본주의와 거친 민족주의가 그곳을 메우게 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미국 자유주의는 점차 기술 관료화되었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상실했어요.
- 16쪽
또한 우리에겐 사서삼경 등의 고전 텍스트에나 등장할 법한 ‘조화’ 등의 개념으로 민주주의, 난민, 젠더 등 현대의 문제를 다루는 모습은 동양철학에 거리를 두고 있었던 독자에겐 생소하지만 퍽 신선하게 느껴질 법하다. 유교적 관점에서 샌델 교수의 논점의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또한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유학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유가적 견해에서 볼 때 샌델의 해결책은 개인의 인격과 반성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적용해 말하면 그것은 실천적 덕이라기보다는 이론적 덕이다. 이와 달리 유학자들은 사회적 조화에 초점을 맞추며 개인을 넘어, 나아가 이론적·주관적 반성을 넘어 자신들의 해결책을 확장한다.
- 40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를 위하여
생존이 최우선시되면 공동체의 미덕은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먹고사니즘’이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같이 고상한 것들은 한가한 소리일 것이다. 내가 당장 살겠다는데, 잘난 놈이 더 가져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각자 따로 살아남자는 분위기가 퍼져나가는 동안 그 사회는 보이지 않는 뭔가를 잃어간다. 바로 인간의 ‘사회적 삶’이다.
인간은 결코 자신의 생존 그 자체에만 몰두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생존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좀 더 사회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더 나은 인간으로 변해간다. 좋든 싫든 우리의 자아가 공동체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 또한 개인주의가 쉽게 간과하고 지나치는 지점이다. 유교적 덕목들을 오늘날 실천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고 갱신하려는 움직임들이 많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오히려 공동체는 사람들이 회피할 수 없는 정체성의 일부다. 즉 “공동체는 그들이 동료 시민으로서 소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나타낸다. 즉, (자발적 결사체에서) 그들이 선택한 관계가 아니라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소속이며, 그저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다.
다시, 명절로 돌아가서
단순히 명절을 폐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는 추석이나 공동체 같은 개념에 지쳐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통을 시대에 맞게 적극적으로 갱신하지 못하고 낡은 채로 방치한 데서 오는 부작용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시차로 인한 고통은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오늘날 공동체가 어떤 도덕을 추구해야 할지, 어떤 공동체를,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샌델을 다시 읽을 시간이다.
그러므로 샌델은 개인들 각자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할 때 공동체가 단지 원초적 단계 이후에 자아에 덧붙여지는 부가물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공자는 샌델이 공동체를 일차적 가치로 이해하는 데 주저 없이 지지할 것이다.
- 33쪽
※ 해당 기사는 와이즈베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