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해왔다. 꾸준히, 주기적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턴 꽤 빈번하게 나다녔다. 취미가 여행이라고 적는 건 너무 뻔하지만 정말로 취미라고 부를 만한 건 여행밖에 없었던 것 같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다시 그리워지고 마는,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하면 어딘가 답답하고 좀이 쑤시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지루한 매일을 버티게 하는 취미는 그것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일상을 환기하고 다시 훅 에너지를 불어넣는 유일무이한 방법. 일본에서 제주로, 강릉으로, 다시 제주로, 가끔은 좀 더 멀리 스페인으로, 그러다 부산으로, 다시 일본으로, 제주는 여러 번 갔고, 태국이나 싱가포르로도, 마지막으로 작년 말의 포르투갈까지.
너무 좋으니까 왜 그게 그렇게 좋은지 딱히 자문해본 적도 없다. 사시사철 갈 만한 곳을 물색하고 계획을 세우고 떠나고 즐기고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다음 여행지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그저 만끽만 해왔다. 나는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나, 굳이 각 잡고 앉아 생각해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 나를 방황하고 갈망하게 했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면 그 근원을 파고들어야 했다.
동시에 일로 만난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여자분들은 다들 해외여행을 왜 이렇게 좋아하시냐고, 해외에 나가서 자아 발견을 한다는데 진짜 그런 거냐고. 남자들은 그런 것엔 별로 흥미가 없다면서. 사실은 나가서 매일 물 쓰듯 돈을 쓰니까 그냥 신나는 거 아니냐며.
‘남자’, ‘여자’를 나눠 일반화하며 ‘그러니 돈을 못 모은다’는 식으로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싸울 만큼의 애정도 없어 그 자리에선 그냥 ‘그러게요’ 하고 말았다. 집에 와서야 정말 ‘해외’여행이 나한테 중요한 건가, 그게 ‘자아 발견’ 같은 거창한 주제와 관련이 있나, 잠깐 생각해보게 되었지만.
해외여행이어야만 하는 까닭은 없다. 최근에 강릉이며 양양이며 가까운 동해 쪽을 여러 번 다녀오면서 더더욱 그렇게 느꼈다. 가까운 곳으로의 짧은 여행도 충분한 환기감이 있고, 국내에도 여전히 내가 사랑해 마지 않을 만한 공간이 넘쳐난다는 걸. 그럼에도 굳이 기회가 될 때마다 해외로 떠나고 싶은 건 아마 더 극적인 전환과 자극이 당겨서일 테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이든 가는 부분이 꽤 비중이 크다. 잠시 잠깐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허공에 떠 있다가 새로운 세상에 내려지는 경험. 어떤 ‘전환’으로서는 기가 막힌 역할을 한달까. 나만 그런 건 아니니 코로나 시대의 아이디어로 체험 비행이나 기내식 식당 같은 상품이 등장하는 거겠지.
일상과 닮은 점이 없을수록 해방감이 커진다는 것도 해외로 가는 여행의 장점이 된다. 매일 보고 살던 것과는 다른 건물들, 다른 자연,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음식. 생전 처음 보는 것들 사이에서 자연히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순간들. 그럼에도 지나다니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뇌의 어느 한쪽은 완전히 쉬는 대신 어느 한쪽은 더없이 팽팽 돌아가야 하는. 더 긴장하게 된다고 할까.
심장을 쿵쿵쾅쾅,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빨리 뛰게 하는 그 묘한 감각이 그간 나를 괴롭히던 오만 걱정일랑 홀랑 잊은 채 지금 이 순간에 온 신경을 세우게 한다. 자아 발견까지 갈 건 없지만, 생경한 환경에서는 원래의 내 모습도 조금 더 뚜렷해지고 새로운 모습도 자연스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모든 말과 행동이 자동화되다시피 한 익숙함 속에서는 흐릿하게만 느껴졌던 것들.
물론 멀리 다니는 여행에는 부수적인 비용도 적지 않고, 말했듯이 해외여행만이 그런 해방감을 선사하는 건 아니다. 지나간 여행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여기에도 밸런스가 중요한 것만 같다. 짧게 짧게 가까이 치다가 가끔은 훅, 길게 한 방 멀리 떠나는 여행. 그렇게 오래 떠나 있다 돌아오면 당분간은 어디 멀리 떠날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돈도 없고).
살짝살짝 또 가깝게 다니다 보면 다시금 치고 올라오는, 완전히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갈망. 국내든 해외든 여행지마다 다른 매력이 있고 가고 싶은 곳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올해 꽂히는 곳은 작년엔 전혀 관심도 없던 나라일 때도 있고. 제주처럼 한 번이라도 더 가고 싶은 곳이 있는 반면, 해외는 주로 저번관 다른 더 새로운 곳을 찾게 된다. 아직 안 가 본 나라가 수도 없이 널려있으니.
그러니 말하자면 어디로 떠나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일상의 무거운 걸음들로부터 도망치는 것. 매일매일의 반복은 똑같은 색의 벽돌로 내 주위에 쌓인다. 멀리 뻗지도 못하고 딱 손 닿을 거리에 차곡차곡. 그게 오래되면 점점 숨이 답답해지는 기분이다.
잠깐의 나들이나 대청소나 영화나 책이 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 벽돌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하릴없이, 저 안쪽에서부터 치민다. 단 며칠이라도, 회사 일이고 뭐고 내 눈에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가서 지금까지와의 생활과 단절되고 싶다는 마음. 그렇게 단절되고 나서야 확 숨이 트이는 감각.
아무리 돌려 말해봐도 소용없다. 직장인이 되고 난 후 더더욱, 내게 여행은 도망이자 도피였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버려둔 일이 그대로 산처럼 쌓여 나를 기다릴 것을 알지만, 시차며 인터넷이며 이것저것 핑계로 삼아 당장은 눈 딱 감고 시야 전체를 바꿔버리는 일.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에서 밝힌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가,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마음을 비슷하게 대변한다.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바야흐로 코로나에 많은 것을 빼앗긴 2020년. 멀리 떠날 때가 되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다. 심지어는 코로나가 잦아들어도 예전처럼 훌쩍 떠나는 해외여행은 더 이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단 예측이 심상찮게 나온다. 돌파구를 잃었다고 주저앉아 숨 못 쉴 수만은 없으니 여행만 한 자극을 찾아야 할 텐데, 아직까진 그게 쉽지가 않다. 여행 프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욕심만 커질 뿐, 애초에 2D가 4D를 대체할 수가 없지. 그저 작년 다녀온 여행의 끝을 붙잡고 겨우겨우 버티는 느낌이다.
마스크 없인 집 앞도 나갈 수 없는 시대에 내 새로운 산소 호흡기는 어디에 있을까. 일상도 여행처럼 살아보라는 조언을 실천해보려곤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아무리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려 해도 늘 똑같은 배경에, 할 일이 줄지어 밀려들고 나를 찾는 알림은 매분 매초 울리고. 돈도 벌면서 청소도 설거지도 분리수거도 하고 강아지 밥도 챙기고 똥도 치우는 그 사이사이에 여행자의 마음을 끼워 넣기란 거의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달까.
배경의 완전한 전환, 일상 의무와의 단절, 태어나 처음 보는 생경한 환경과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여행이 그립다. 여행이 주는 감각이 너무나도 그립다.
원문: 소화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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