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포르투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이른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2박 3일간 호스텔 방에 펼쳐 놓은 짐을 정리해야 했다. 아침 식사 시간 마감 직전에야 겨우 차가운 우유에 만 시리얼을 한술 뜰 수 있었다.
늘 그랬듯 조식을 먹으며 일행과 오늘의 일정을 점검했다. 우선 아침 식사를 마치면 체크아웃을 하며 호스텔 프런트에 짐을 맡긴다. 그리고 포르투에서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들을 돌아본 후, 오후에 고속버스를 타고 리스본으로 이동한다. 이번 생에 다시 오게 될지 기약이 없는 도시, 포르투의 매력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몸 안에 저장하고 싶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갖가지 언어들이 난무하는 다국적 여행객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기죽지 않고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의 목소리가 컸던 걸까?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시작된 그곳을 돌아보니 중년은 훌쩍 지났을 화장기 없는 얼굴의 여성분이 싱긋 웃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니 우리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오신다.
역시나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가 반가워 냉큼 달려왔다는 한국 분. 함께 늦은 아침을 먹으며 간단한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엄마와 딸. 딱 그 나이 차이인 우리는 ‘여행’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금세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환갑 가까운 나이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 K선생님. 정년퇴임 기념으로 인생의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걸으셨다. 한 달 넘게 순례길을 걸었지만 생각보다 일정도, 체력도 남아 스페인에 온 김에 바로 옆 포르투갈 여행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전날,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넘어온 K선생님은 우리에게 포르투에서 가보면 좋을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셨다. 스마트폰이 손에 익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오랜 습관인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수첩을 꺼내셨다.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우리가 추천한 숨은 명소, 음식점, 길거리 간식의 이름과 위치를 꼼꼼하게 메모하셨다. 단 3일 먼저 왔을 뿐인 포르투 여행 선배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기록하는 K선생님. 그녀는 내가 봐온 많은 어른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식사 내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K선생님은 결코 우릴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내 경험이 대단하고, 아직 조무래기인 너희들은 더 배워야 해.‘ 라며 젊은이들을 낮춰보는 꼰대 뉘앙스 따위는 없었다. 대신 한참 어린 우리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정중하게 귀담아 들어주셨다.
본인은 이 나이 때 상상도 못 했을 여행을 하는 아가씨들이 대단하다며 쌍 엄지를 올리셨다. 선생님의 칭찬에 부끄러웠다. 우린 20대의 청춘들처럼 패기와 도전 의식 따위는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무리하지 않는 우리 속도의 여행을 할 뿐인데… 예순의 늦깎이 여행자의 눈에는 30대 중반의 우리도 그저 싱그러운 청춘일 뿐이었다. K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궁금증이 차올랐다.
K선생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난 어떤 모습일까?
그때 난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날 통장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그때 난 한 달 넘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도 여행을 이어갈 체력이 남아 있을까?
그때 난 새로운 것들과 마주할 때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을까?
아직 가보지 못한 할머니가 된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눈가에 주름살도 가득하고, 머리엔 눈이 쌓인 듯 흰머리가 가득한 예순 언저리의 내 모습. 내 덩치만 한 배낭을 메고 순례길을 걷는 모습. 노안으로 흐릿해진 눈으로 지도를 보는 모습. 과연 K선생님 같은 삶, 그리고 여행을 하고 있을까?
K선생님처럼 예순 무렵에 혼자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여행할 깡과 여유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K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꿈이 선명해졌다는 사실이다. 포르투 여행 경험은 우리가 선배일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내가 바라는 완벽한 인생의 선배였다. K선생님에게 나이는 무기도 아니었고, 약점도 아니었다.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 경험의 가치를 존중하는 그 어른의 모습을 닮고 싶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겁 없이 돌진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이 피어올랐다.
식사 마무리 후 서로의 여행이 안전하고 행복하길 빌며 헤어졌다.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이 대부분 그렇듯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기약이 없었다. 운이 좋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계획했던 오전 일정을 마치고 리스본행 고속버스를 타기 전, 맡겨둔 짐을 찾기 위해 호스텔로 향했다. 로비에 들어서니 K선생님이 그곳에 계셨다. 선생님은 노트북으로 꼼꼼하게 여행 루트를 정리 중이셨다. 정말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가방 깊숙이 넣어 뒀던 홍삼 스틱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건 단순히 건강 보조제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K선생님의 여행, 그리고 인생을 응원하는 마음을 듬뿍 담았다.
K선생님과의 만남은 짧았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이 아닌 눈빛과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어른이라는 기준’은 내 인생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