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행을 다녀온 지 1년이 되었다. 터키·포르투갈·스페인을 약 두 달 정도 다녀온 2019년 여름이 마지막 여행이다. 이후 결혼하고 이사를 했다. 그러고 났더니 코로나 시대가 되어서, 여행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국내 여행을 다녀볼까, 했더니 지난 2주간 비가 어마무시하게 쏟아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디스크가 발병하여 누워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이래저래 2020년은 또 다른 의미로 기억에 많이 남을 한 해가 될 듯하다. (하하하하)
이제는 여행이 아니라 그저 정상적으로 걷고, 앉고, 돌아다니는 걸 그리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던 지난 4년이 오천 년 전 일만 같다. 혹시 그것은 다른 생이 아니었을까?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4년간 아무 곳에서나 자고 일하면서 나의 불쌍한 허리와 목을 혹사시켜서 이 모양 이 꼴이 난 게 아닌가 싶다. 디지털 노마드를 입에 담는 모든 이들에게 다 필요 없고, 일단 허리 디스크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 아무도 이 이야기를 안 해준 거야.ㅠㅠ 카페에서 장기간 일을 하면, 허리가 박살 납니다. 조심하세요, 여러분.
노마드가 여행을 못 가서 어쩌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더라. 처음에는 “에이 뭐, 이 정도야 괜찮음요. 여행 지긋지긋해요 ^^”에서 ” 아… 그러게요ㅠ_ㅠ 여행 넘나 가고 싶어요”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여행이 뭔가요? 허허허.” 웃고만 있다.
여행이 아니라, 이제는 집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자, 곰곰이 “여행” 이란 것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되새김질을 해보았다. 정리해보니 대략 이러하다.
1. 탈출
어디든 확 떠나고 싶을 때! 익숙한 환경, 익숙한 인간들, 먹는 거 몽땅 다 확 바꿔버리고 “떠날 거야!”를 외치는 거다. 빨간 EXIT 버튼 누르고 탈출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이랄까?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지만,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아 여기도 똑같이 닌겐 사는 곳이군”하면서 실망할 수 있다.
2. 갓성비
어차피 노트북으로 일하는 건 똑같다. 그렇다면, 가성비 갑인 곳에서 쾌적한 기후와 음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음? 추운 겨울엔 따끈한 치앙마이에서, 덥고 습한 여름엔 기분 좋게 더운 베를린에서 지내는 것! 같은 백만 원이면 치앙마이의 수영장 딸린 콘도에서 1일 1 마사지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를 외치면서 떠나는 것.
그러나, 생각보다 이러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들 제약된 인간관계에 의한 심각한 외로움을 호소하게 된다. 심지어 강아지 키우기도 어렵다고!
3. 흥청망청
여행은 좋은 핑곗거리다. “그래! 이건 여행이니까! 휴가 기간이니까! 써! 질러!” 를 외치면서 단기간에 좋은 것 먹고, 좋은 곳에서 잔다. 럭셔리를 먹고 마시고 누리다 보니까 당연히 행복해진다.
부작용으로는 휴가 끝나기 전날 우울증이 온다든가, 지갑이 얇아진다든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 등이 있다. 게다가 나처럼 절약 정신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진 인간은 거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다.
4. 모험
전혀 가보지 않았던 곳. 혹은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들. 용기 1그램 쥐어 짜내어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서 ‘도전’해봐야 아는 것. 모험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모험의 형태는 다 다르다.
평소 골골거리는 빈약한 인간이 갑작스레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겠다면서 떠나는 것도 모험이다. 추위에는 학을 떼는 인간이 갑자기 오로라를 보겠다며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것도 그렇다. 근검절약의 화신인 사람이 도박을 해보겠다면서 마카오에 주사위 던지러 가는 것도 포함된다.
즉 이게 바로 ‘나’라고,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규정한 프레임을 뚫고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해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모험인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알고 봤더니 내가 카지노의 신일 수도 있다! 혹은 알고 봤더니 나라는 인간, 여전히 추위를 겁나 싫어할 수도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일상생활에서도 변화와 도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개 ‘여행’을 핑계 대고 하게 되는 듯하다. 그 모험들은 뼛속 깊이 새겨지게 마련이다. 지난 4년간의 여행 중 가장 소중하게 기억된 순간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전기도, 인터넷도 통하지 않는 태국 오지 농장에 들어간 날 저녁. 아는 사람 1도 없는 모로코에 혼자 가보겠다면서 떠나기 전날 저녁. 처음으로 코리빙 하우스를 해보겠다며 태국에서 커다란 집을 빌려서 혼자 잠을 청하던 저녁. 미얀마에서 트레킹 하다가 잠을 청했던 외딴 절에서의 밤. 숨 턱턱 막히면서 간신히 지팡이에 기대 올라갔던 페루의 해발 5천 미터 레인보우 마운틴.
아, 마지막으로 모험을 떠나본 것이 언제인가. 누워서 이걸 컴퓨터에 두드리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금 발견한다. 그래, 난 우울하면 글쓰기로 돌아오는 인간이었어.
코로나가 끝나면, 그런 ‘진짜 모험’을 떠나고 싶다. 절대 안 간다고 했던 추운 북유럽에 가서 사우나도 해 보고 싶고, 오로라 구경도 해 보고, 썰매 개랑도 놀아 보고 싶다. 허리가 아파서 지금은 꿈도 못 꾸지만, 말을 타고 몽골 초원을 달려 보고 싶다. 동남아 어느 국가에서 노트북 들고 일하면서 여행 왔다고 위안 삼는 거 말고, 진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원문: 박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