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조끼 시위] 1. 노란조끼가 어쨌다고?」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노란 조끼’라 하면 폭력 시위나, 모두가 경악한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 방화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초기 노란 조끼 시위는 이처럼 과격하지 않았다. 심지어 샹젤리제가 있는 파리처럼 대도시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 시위를 한 곳은 홍포앙(rond-point)이라 하는 원형 교차로, 즉 대도시와 대도시 사이 텅 빈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저 새로운 유류세 인상 정책에만 반대하던 사람들이었다. 토요일만 되면 도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던 노란 조끼의 시작은 왜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던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와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의 샤를 드골 장군이 집권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프랑스의 정치 체계
프랑스의 정당은 크게 좌파(la partie gauche)와 우파(la partie droite)로 나뉘어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왕권 체제의 존속을 주장한 당이 우파, 반대의 주장을 한 당이 좌파로 나뉜 것이 프랑스 정당 분리의 시초였다.
좌파와 우파의 최종 지향점은 같다. 둘은 프랑스의 번영과 프랑스인들의 행복이라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서 프랑스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 좌파의 목적은 사회 불평등의 최소화다. 학교, 병원과 같은 공공 서비스의 질과 양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국가에 의한 부의 재분배와 엘리트주의(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에 대한 탄압을 주장한다.
- 반면 우파는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즉 국가는 부를 축적하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것을 혁신하고 산업을 발전시킬 개인을 장려한다. 메크리토크라시- 실력과 능력이 있는 소수의 개인이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우파이다.
즉, ‘민영화’라는 소재에 대해 찬성하는 정당이 우파, 개인이 아닌 국가에 의한 서비스를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정당이 좌파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프랑스의 빈민층은 좌파를, 부유층은 우파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참고로 현 대통령인 엠마누엘 마크롱은 그가 펼치는 정책의 방향성과 무방하게 좌파와 우파 둘 중 어느 정당에도 치우치지 않은, ‘나는 좌파도 아니며 우파도 아니다 (Ni gauche, ni droite)’를 표방하는 인물이다.
샤를 드골의 국토 정책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은 세계 2차 대전 중 나치에 점령당한 파리를 탈환하고 전쟁에 피폐해진 프랑스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다.
종전 후, 그는 프랑스가 당시 막대한 자원과 경제력을 갖춘 미국, 영국, 독일처럼 산업화를 해야 함을 주장했다. 따라서 에너지, 교통, 통신 등 프랑스의 모든 시설들을 산업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모두 프랑스의 경제 발전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가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가임을 알고 나면 드골이 경제적 이익 도출을 위해 매우 계산적인 정책을 펼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원활한 산업화를 위해 그는 새로운 국토정책을 펼쳤다. 이전의 프랑스 지방 행정구는, 프랑스 영토를 3만 6,000개의 데파르트망(département)으로 나눈 형태였고 이는 프랑스혁명 중 채택된 이후로 약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개편되지 않은 상태였다.
데파르트망은 작은 공동체들이 프랑스 본토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인데, 이는 농촌 중심지의 사회에서 각 데파르트망이 서로 균일한 면적을 차지하고 데파르트망 내부 편의시설의 거리가 끝에서 끝까지 2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즉 파리, 리옹, 보르도, 툴루즈, 릴, 몽펠리에 등 대도시와 중간 크기쯤 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병원과 대학 같은 편의시설이 몰려 있고 그 주위를 아주 작은 규모의 마을들이나 숲이 둘러싼 현재의 프랑스 국토 양상과 달리, 샤를 드골 이전에 지속해온 행정구의 모습은 각 데파르트망에 각각의 편의시설이 있고 물자 운송과 공급의 중심지라 할 만한 대도시나 중도시의 개념이 없는 형태였다.
그러니 필요한 물자들은 각 데파르트망 안에서 데파르트망에 거주하는 사람끼리 자급자족하는 형태였고, 물자의 교환이 필요하다면 근처의 데파르트망에서 수레나 배 따위로 물자를 주고받았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교통이 발달하고, 기차를 통해 먼 곳까지 다량의 물자를 공급할 수 있게 되자 이런 형태의 데파르트망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게 되었다. 또 샤를 드골은 각각의 작은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의 농작물을 생산하는 것보다 한 구획을 농경지로 지정하고 그곳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의 농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샤를 드골은 작은 마을들을 합병하여 규모가 큰 중심 도시로 만들었고 병원, 학교, 시청 같은 주요 시설들은 도심지로 몰리게 되었다. 자연히 도심과 도심 사이, 지금의 홍포앙이자 이전의 데파르트망이었던 공간은 주요 시설 하나 없고 약간의 주거지만 있는, 텅 빈 곳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도심의 사이 빈 공간에서도 사람은 산다. 도심지의 비싼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매일 아침 자동차로 일자리가 있는 도심지로 출근해야 한다. 그러니 유류세를 올리겠다는 새로운 정책은 홍포앙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마크롱 정부가 친환경 경제와 환경오염 방지를 위해 2018년 1년간 경유는 23%, 휘발유는 15%나 인상하며 심지어 2019년에 추가로 인상을 한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크롱의 표어가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와 모순적이게도 기업에게는 세금을 삭감해주지만 개인에게 조세 부담을 안기려 하는 우파 정책을 실시하려 한다는 반발과 더해져 노란 조끼 시위가 초반의 유류세 인상 반대 시위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고 마크롱의 탄핵까지 외치는 시위가 되었다.
따라서 노란 조끼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자, 유류세 인상 후 그들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홍포앙에서 처음 시위를 한 것이고 이것이 농촌과 중간 도시로 확대되며 시위의 규모가 커졌다. 다양한 상관관계가 얽히고설킨 프랑스의 노란 조끼 시위. 하지만 결국 프랑스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개선문을 파괴하고, 여러 경제적 손실을 이룬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럼 ‘노란 조끼 시위대’로서의 노란 조끼 말고, 한 사람으로서의 노란 조끼는 어떤 모습일까? 다음 포스트에는 개인적으로 만난 노란 조끼 시위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다.
원문: 샤에바 Chaeva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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