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불러 주어야 나는 비로소 꽃이 되는가
개성이 중요해진 시대가 오면서, 남들과 차별화된 나와 자아를 찾는 과정이 중요시를 넘어 거진 신성시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책 한 권은 꼭 ‘나’와 ‘자아’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한다. 이
렇게 전국적으로 내가 누군지 찾아 떠난 여정이 트렌드가 된 시점에서 누군가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유년기의 따뜻한 추억, 우연한 운명적인 계기, 특별한 개인적 경험들이 ‘나’를 형성하는 요소라는 대답을 피한 이유는, 무의식 언저리의 기억들을 인지하여 의식의 영역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그 모두를 아우르는 ‘나’의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역할들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단 하나의 페르소나(개인이 사회생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나 성격)를 가지기란 불가능하다.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성격들을 마주하면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고민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란 어떤 것인가? 쉬운 예시로 ‘방구석 여포’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삼국지에 나오는 포악한 명장인 여포처럼, 방구석 컴퓨터 자판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하며 불의를 참지 않는 화끈한 호걸이지만 방 밖으로 한 발짝만 나와도 방금 청학동 서당을 졸업한 선비처럼 조신해지는 사람들을 방구석 여포라고 부른다.
즉, 방구석 여포들은 현실과 비현실,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과 낯선 공간이라는 대비되는 장소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방구석 여포의 진짜 페르소나는 화끈한 양반과 조신한 선비 중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둘 다일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는 단편적이지 않다. 사회와 삶의 현장이 다양화되면서 자아 정체성 또한 다양하게 표출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다른 성격이 도출되는 것이다.
여기에 요즘은 ‘방구석 여포’처럼 온·오프라인 공간의 역할에 따라 다른 자아 정체성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선 ‘나’의 자아가 상황에 따라 분리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I, my, me, myself가 아니라 ‘myselves’의 시대
Myself가 Myselves로 확장되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 있다. 혼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홀로 사는 것도 좋다. 그러면 내가 어떤 성향과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그런 과정을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겪었다. 당시 불어로 ‘안녕’과 ‘고마워’밖에 말하지 못하는, 인사성만 좋은 동양인이었던 나는 나쁘게 말해 기가 꺾여 살았고, 좋게 말해 나의 내향적 성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나야말로 대한민국 방구석 여포였던 것이다….)
조금 풀이 죽고 미묘하게 소심한 내 페르소나를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늘 주목받고 당당하고, 겁 없고, 심지어 조금 ‘싹수없다’는 평가까지 겸비한 한국에서의 페르소나를 억지로 꺼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애를 쓰는 부자연스럽고 안쓰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결국 나는 나의 내향적인 페르소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렇게 다른 인격의 ‘나’로 낯선 곳에서 살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새로운 페르소나로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런데 의외로 살 만했다!
페르소나는 사회 활동을 하면서 자연히 생격난다. 이전에도 무의식적으로 상황·장소·역할에 따라 페르소나가 달라지는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경험은 내가 의식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이전의 경험보다 직관적으로, 다양한 페르소나의 체험을 해볼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의식을 외부에서 내부로 집중시켰다. 이전에는 남들이 바라보는 나에 대해서만 의식했다면, 이제는 내면에 골고루 분포된 페르소나들을 인지하고 그들을 보듬기 시작했다. 남들의 기준에 미달하는 페르소나도 나의 인격이고, 나의 자아였다. 이렇게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완벽한 형태의 원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 만물 다 마찬가지다. 그래도 차이점은 있다. 인간은 끝없는 연습을 통해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내가 프랑스에서 긴 고찰을 하게 된 계기 자체는 별것 아니었다. 미술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어디선가 만다라 컬러링 페이퍼를 가지고 왔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와 함께 색칠을 했다. 그런데 문득 이 만다라의 형태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다라는 작은 점으로부터 전체로 확장된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면 물의 표면에 파동이 일듯이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는 형태다. 이는 무언가의 자극을 받아 섬세히 움직이는 무의식의 세계와 닮아 있다. 만다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장 크고 화려한, 가장 바깥에 있는 패턴이지만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중심부의 패턴이 견고하지 않으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만다라는 ‘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원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다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린 만다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같은 모양, 같은 색을 지닌 패턴은 없다. 어떤 것들은 서로 모양이 다르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찌그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완전한 패턴들의 집합은 완전한 원처럼 보인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화합은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조합된다.
우리가 가진 페르소나들을 마주하는 것은 만다라를 그리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큰 인격체를 이루는 것은 단일적인 페르소나인 ‘myself’가 아니다. 여러 개의 복합적인 페르소나, ‘myselves’들이 모인 형태다. 각각의 페르소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모여 형성한 것이 나이고, ‘나’가 되는 기반이 바로 나의 페르소나들이다.
이렇게 나는, 만다라를 통해 내면을 보듬고 나의 페르소나들을 마주한다. 작은 점에서 큰 모양으로 천천히 확장하는 만다라를 그리며 나의 무의식들을 발견하고, 안아준다. 이렇게 매일 새로운 ‘나’를 마주하고 안아주는 과정이 이젠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매일, 만다라를 그린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유명한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무엇이 나를 불러 주어야 꽃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정답은 ‘나’만이 알 수 있다. 만다라를 그리며 나의 무의식이 의식으로, 작은 점에서 완전한 형태인 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관찰해보자. 결국 모든 것은 나를 향한 애정과 관찰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원문: 샤에바 Chaeva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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