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태어나고 종국에 눈을 감을 때까지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한 아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가 가진 특성들을 정리하는 한편, 차츰 주위 세상 속에 스스로를 녹여 간다.
부모, 선생님, 또래 등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이해하는 한편, 다양한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익히며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주변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심리학자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건강한 사고를 지닌,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중요한 과업이라 여긴다. 소위 ‘정체감(identity)’ 에 대한 심리학 이론들은, 청소년기 진입과 더불어 극심한 정체감 혼란이 찾아왔을 때, 그 위기(criss)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에 따라 이후 성인기의 모습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은 그의 유명한 심리사회적 발달 이론(psychosocial developmental theory)을 통해 정체감의 혼란과 극복의 과정이 비단 청소년기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려 여덟 번이나 변화와 성장을 위한 도전들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뻔하디뻔하지만, 너무나 진부해서 심드렁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무척 중요하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의식을 품은 모든 유기체의 가슴속 깊숙이 각인된, 본능적인 의구심이라 할 것이다. 단순히 먹고, 옷 입고, 자는 것 이외의 것을 얻고자 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반추(反芻)하고 또 반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이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높은 자존감을 영위하고 싶은가? 인격적 성숙을 꿈꾸는가? 번뇌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주목하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이 질문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라. 새롭고 또 새롭게, 스스로를 발견해 나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
그렇다면 ‘나’에 가깝게 다가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단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일단 버려라.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무수한 세부 조각 속에서야 간신히 모습을 드러낼 법한 그 무언가다.
혹은 정신 영역의 깊디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끄집어낼 수 없는 그 무언가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고 싶다면 그것을 위한 여정은 절대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우선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과정이 어렵거나, 지루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신비하고 오묘하다. ‘내가 모르는 나’를 알아간다는 느낌은 색다르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 끝에 맛보게 될 성취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실 의외로 간단하다. 이것만 기억하자. 끊임없이 ‘나’에 대해 기록하라. 세상에 대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되돌아오는 온갖 형태의, ‘나’라는 필터를 거쳐 도달한 사유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라.
- ‘자아탐색’
- ‘강점 찾기’
- ‘성격유형탐구’
- ‘자기계발’
- ‘정신수양’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구체적인 노력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여러 가지 탐색 활동들을 통해 ‘나’를 나타내어 줄 수 있는 단서들을 열심히 생산해내고, 그것들을 그러모아야만 한다.
왜 ‘나’에 대한 기록물을 남겨야 할까? 잠깐 현대 심리학의 속성을 들여다보자. 심리학은 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인문학적 뿌리를 가지지만, 자연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과학성을 강조하는 학문이 되었다. 즉, 심리학은 더 이상 사유(思惟)만으로 굴러가는 학문이 아니게 되었다.
연구 대상에 대한 관찰과 측정, 그리고 반복 측정. 이것이 곧 현대 심리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 핵심을 말하자면, 현대 심리학에서는 ‘데이터(data)’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신뢰롭고 타당한 방식으로 수집된 데이터의 뒷받침이 없다면 심리학적 분석, 심리학적 연구 내용들은 힘을 잃는다. 이는 ‘자기(Self)’에 대한 심리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자기 존중감(Self-esteem), 자기 효능감(Self-efficacy), 자기 고양(Self-enhancement), 자기 위주 편향(Self-serving bias), 자기 지각(Self-perception), 자기 가치 확인(Self-affirmation) 등등 온갖 이론과 연구 체계들은 모두 데이터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나’에 대한 기록물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이다.
- 일기를 쓰든 에세이를 쓰든, 단어만 나열하든, 마인드맵을 하든, 그림을 그리든 무엇이든 여러분 자신에 대한 것을 남겨라.
- 당신이 보고 들은 것 또한 가능하면 흔적으로 남아야 한다. 책을 봤다면 서평을, 영화를 봤다면 감상문을 남겨라. 게임을 했다면 리뷰라도 쓰고, 정보 글이라도 써라. 드라마, 예능에 대해서도 끄적거려라.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복잡하디 복잡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소중한 퍼즐 조각들이다.
- 심리학에서는 ‘내가 보는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이 보는 나’ 역시 ‘나’의 구성 요소로 본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타인들의 온갖 증언들을 끊임없이 수집하라.
심리학에 대한 케케묵은 오해가 바로 ‘내가 누군지 맞춰봐’,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맞춰봐’ 아니겠는가? 심리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저런 질문을 듣게 되면 불쑥 이런 생각이 앞선다. ‘정보 하나 안 주면서…’ 정보가 있어야 뭐든 가려낼 수 있는 법이다.
심리학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때려 맞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무분별하게 쌓여있고 흩어져 있는 정보들 가운데에서 의미 있는 정보들을 골라내는 한편, 그 정보들 속에서 대상에 대한 패턴과 속성을 발견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부지런한 정보 수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심리학자는 당신의 마음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일상의 과학자(naive scientist)인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정보 탐색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금방 흩어진다. 따라서 잡아 끄집어내고, 기록물에 박제시켜놓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문장이 깊게 쌓이고, 문장의 길이가 차츰 늘어갈 때면 여러분의 머릿속 무의식의 세계에 깊숙이 박혀 있던 내용까지 주렁주렁 의식 밖으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모아라.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정보 간의 패턴을 찾아보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져라. 정 어렵다면 때때로 심리학 전문가를 찾아가 정보의 보따리를 한 아름 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