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토리텔링과 만화. 인터넷커스텀, 웹툰(1)에서 이어집니다.
2.2 게임북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혹시 늙은이 여러분들(…)은 게임북을 기억하십니까? 게임북이란 독자가 책을 선형적인 방법으로 읽지 않고, 글의 각 지점에서 주어진 선택을 하는 콘텐츠를 말합니다.
이런 거죠. <호크 대탈출 작전>이에요.
위 그림에서도 나타나있듯이, 게임북은 선형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선택지를 주고, 그에 따라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비선형적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죠. 게임북과 같은 비선형적인 텍스트는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에드워드 패커드의 ‘당신의 모험을 선택하세요(Choose Your Own Adventure)’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위에서 저는 만화는 지면을 분할하는 것이 예술적 기법이자 양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법은 엄밀히 말하면 인쇄매체의 한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미지로 스토리를 전달하고 싶은데, 크기와 분량이 일정하고 장으로 넘겨야 하는 종이묶음 위에서 해야 했단 말입니다.
사실, ‘한계’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흔히 디자인을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하듯, 한계라고 불리는 것을 오히려 이용하면서 기법을 발전시키면 특정한 예술적 양식이 됩니다. 종이를 한계로만 생각해서 기법의 발전을 포기했다면, 만화는 영화에 밀려서 없어졌겠지요.
따라서 한계를 어떻게든 해제하거나 도리어 이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종이책이 갖는 중대한 한계는 한 가지 더 있었죠. 바로 선형성입니다. 독자가 오직 하나의 이야기를, 작가가 배열한 순서대로만 따라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은숙은 종이책, 즉 인쇄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쇄텍스트의 선형성은 견고하다. 고정된 공간을 차지하고 지면 위를 흐르는 선의 형태는 늘 직선이다. 저자나 독자 모두에게 선의 굴곡이나 변형은 허용되지 않고, 더욱이 그 선을 떠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텍스트에서는 독자가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하거나 수정을 하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 인쇄텍스트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권위적인 텍스트에 대해 독자는 수동적인 자체를 취하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의미를 생산하는 위치에 있고, 독자는 그가 만든 의미의 체계를 찾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호은숙, 2009, p.13).
또한 전경란은, “물리적 실체로서의 텍스트는 저자에 의해 완결된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대상(finite object)이며, 그 자체로 완비되어 있는(self-contained) 고정된 것이다”(임가은, 2004, p.189, 재인용)라고 말하여, 활자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성격을 설명하였죠.
배식한은 전통적인 텍스트의 형태는 책이라고 하면서, 책은 장으로 구성되고 클라이맥스와 결말을 가지며, 두께로서 시작과 끝을 독자에게 알려준다고 말합니다. 또한 책은 기본적으로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 책을 통한 글쓰기의 목적은 바로 ‘위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계란 장, 절, 세부항목으로 내려가는 층들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 즉 연상 작용과 비슷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엄청난 금욕의 결과물이라고 역설하죠. 배식한은 계속해서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의 ‘소설의 힘은 선(line)이라고 하는, 저자의 감독 하에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그 운동 속에 구현되어 있으며, 인쇄의 긴 역사 동안 이 선의 힘에 맞서기 위한 많은 전략들이 있어 왔다’는 말을 인용하며(배식한, 2000, p.32~35), 전통적인 책의 형태가 가진 사유의 폭력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인쇄와 책에 의해 규정되는 글쓰기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이죠(배식한, 2000, p.124).
이러한 선형성을 비틀고 수동적인 독자를 참여적인 청자의 지위로 복권시키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18세기의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의 <트리스트람 샌디(Tristram Shandy)>에서는, 주인공 트리스트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작가는 소설의 4권 24장을 뛰어넘고 25장을 시작하고선 24장은 뜯겨나갔다고 말하며 쪽 수도 건너 뛴 것처럼 매겼죠. 때로는 원고가 훼손되었다면서 일부 글자를 읽을 수 없도록 비워 놓고 무엇인지 맞춰보라고 하기도 하고, 아예 페이지 자체를 비워놓고 독자가 채우도록 참여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수수께끼와 은유, 함축된 문장으로 쓰여진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의 <율리시즈(Ulyses)>, 어떤 페이지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씌어진 <피니건의 밤샘(Finnegan’s Wake)>, 보르헤스(Borges)의 <허구들(Ficciones)>(배식한, 2000, p.25~26)과, 1960년대에의 최초의 멀티엔딩 소설이라고 평가되는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azar)의 <Hopscotch(원제:Rayuela)> 등도 선형성을 탈피하려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비선형적 시도는 만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종이책의 굳건하고 위압적인 선형성을 깨뜨리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만화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쁜 뜻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 이후로, 종이에 쓰인 인쇄텍스트가 인류의 사고방식을 박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이런 인쇄텍스트의 한계를 탈피하려는 시도를 하이퍼텍스트라고 합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원래 컴퓨터 용어로 시작되었습니다만, 기존의 인쇄텍스트에도 실시되었던 비선형성 추구 실험들도 ‘하이퍼텍스트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1965년에 최초로 하이퍼텍스트란 말을 만든 테오도르 넬슨(Theodor Holm Nelson)은, 생각의 구조는 결코 순차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생각은 모든 지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에도, 늘 사물을 비순차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키려고 한다고 하면서, 각주도 순서에서 벗어난 일탈이라고 했죠. 그는 작가가 순차적으로 글을 써내려가지 않아도 될 때, 독자가 순차적으로 읽지 않아도 될 때, 그리고 독자가 매 지점에서 영감을 받고 돌아다니며 읽고 싶은 대로 읽고 경로를 모색할 때 더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랜덜 패커; 켄 조던(편), 2004, pp.284~285).
아래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연재된 크리스 웨어(Chris Ware)의 지미 코리건(Jimmy Corrigan)입니다. 만화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예술적 실험이라고 한다면 항상 등장하는 작품이예요. 저도 한 권 가지고 있는데요, 읽기가 힘들어요. 내용도 괴롭고요. 그걸 떠나서.
성완경은 지미 코리건에 대해서, 칸과 칸 사이에 즉각적으로 판독되는 만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페이지에 감추어진 내적 연관을 읽는 것이라고 합니다. 독자들은 단일한 시간순서가 아니라 비연속적, 비순차적으로 제시되는 이 시각적 힌트들을 따라가며 과거와 현재, 회상과 현실, 실제와 픽션 사이를 가로지르며 여행해야 하죠. 크리스 웨어는 만화 구석구석에 하이퍼텍스트로 통하는 연상의 통로들을 무수히 숨겨놓았다고 합니다(2001, p.292). 출판사의 입장에서 지미 코리건은 편집 지옥이었겠죠.
이렇게 인쇄텍스트에 하이퍼텍스트적 실험이 시도되고 있는 동안, 인터넷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