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악순환 기업의 정체와 이를 피하는 법 과, 이어서 게임업계 취업에 필요한 능력, 이력서/포트폴리오 작성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오늘은 게임업계에서 어떤 식으로 성공적 커리어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대기업에서 커리어 시작하기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는 요령에 대해선 이야기를 했으니 실제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열정착취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대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이다. 꼭 굳이 N으로 시작하는 회사가 아니라도 순위권에 올라있는 게임을 서비스하는 회사라면 대기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적어도 급여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직원이 많으므로 환경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많은 것 또한 열정착취를 피하기에 유리한 환경이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아까 말했던 수시 채용인데, 이 경우 필요한 것이 바로 인맥이다. 학연, 지연, 세습, 음서, 이런 차원이 아니라, 신입은 실력을 가늠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에 내부 인력의 추천을 선호한다. 추천받은 사람을 채용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 추천자까지 욕을 먹으므로 실제로는 추천이 아니라 보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급할 경우 추천과 공개 수시 채용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하지만 추천을 먼저 받아보고 마땅한 인재가 없을 경우 수시 채용을 공개하기도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인맥이 없다고 해서 좌절하긴 이르다. 추천을 받으면 면접까지 가기 수월하긴 하지만 결국 면접에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그걸로 게임 셋이다. 아무리 맨시티가 리그 우승으로 시드를 받아 예선 없이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조별 리그에서 2위 안에 들지 못하면 8강에 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그리고 예선을 통과하는 방법은 위에 이미 설명했다.
인맥의 또 다른 이점은 채용 정보가 쉽게 잘 들어온다는 것인데, 게임잡 같은 채용 사이트나 각 회사의 채용 공고란을 부지런히 모니터링하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순 있긴 하다. 하지만 추천을 먼저 받은 뒤에 공고를 올리는 경우는 한발 늦을 수밖에 없으므로 웬만하면 인맥도 잘 넓혀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대기업의 정시 공개 채용이 있다. 다들 정시 공채라고 하면 경쟁률이 치열하고 들어가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인맥이 없다면 수시보다 더 쉬운 것이 바로 공개채용이다. 일단 인맥과 능력이 되는 경쟁자들은 대부분 수시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공채에 지원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대기업 공채를 지원하는 친구들 중엔 일반적인 기업 공채를 준비한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게임업계 특화형 인재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또 수시는 해당 인력을 필요로 하는 한 팀에서만 면접이 진행되는 반면, 공채에서는 관심을 갖는 팀들이 돌아가면서 면접을 보기 때문에 자신을 여러 팀에 노출할 좋은 기회다. 가끔은 여러 팀을 두고 지원자가 초이스하는 경우도 생긴다.
정리하자면, 수시 채용은 부지런히 공고를 모니터링하고 인맥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기본기만 잘 갖춰져 있다면 공채도 그리 어렵지 않으므로 겁먹을 필요가 없다.
악순환 기업을 피해 작은 기업에서 커리어 시작하기
그런데 최근 온라인 게임에서 모바일 게임으로 대세가 옮겨가면서 대기업들도 구조조정을 하고 있어, 수시든 공채든 과거에 비해 기회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과거엔 작은 회사가 악순환 기업일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모바일의 진입장벽이 낮아지면서 개발자들이 독립해 작지만 튼실한 기업을 세운 케이스도 많으므로 작은 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악순환 기업만 피할 수 있다면.
사실 악순환 기업을 피해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내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연봉은 어떠한지, 일은 얼마나 시키는지, 분위기는 어떤지 등등은 다른 누구보다 내부인이 더 잘 안다. 해당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을 직접 알지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업계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는 어느 정도 공유 받을 수 있다.
다만 회사에 대한 평가는 원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야구단을 가진 거대 기업도 거대 기업 나름의 내부 문제를 가지고 있고, 직원 수가 다섯 명 밖에 안되고 임금도 적지만 구성원들이 만족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경우 앞서 말한 지망생의 ‘친한 형’처럼 아무런 악의 없이 사람을 악순환 기업으로 추천할 수 있으므로, 종합 평가만 신경 쓰지 말고 객관적인 디테일을 보자.
일단 가장 먼저 임금이 체납된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이미 체납된 임금을 지불했다고 하더라도 회사에 뚜렷한 수익원이 없다면 이 회사는 투자금을 까먹으면서 운영되고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임금이 체납된 적이 있는 회사라면 두 번, 세 번 임금이 체납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구성원들의 근속연수를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 회사가 잘 운영되고 있다면 딱히 옮길 필요가 없으므로 그 회사에서 근무한지 3년이 넘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이 적고 업무량이 지나치게 많다면,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여건이 되는 한 이직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1~2년 차 신입이 과도하게 많거나,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짧은 회사는 강하게 의심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인맥이 부족해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없다면 가급적이면 안전하게 큰 회사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만, 당장 면접을 보러 가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당장 신입에게 제시하는 초봉이 얼마인지만 봐도 어느 정도 견적이 나온다.
당신이 터무니없이 연봉 0.5억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당신 보기에 적은 연봉은 남이 보기에도 적다. 따라서 이 회사는 인력이 빠져나가도 벌충하기 쉽지 않을 것이므로 2~3명 분을 한꺼번에 짊어질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연봉이 적다고 생각되면 주저 없이 포기하는 것이 편하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괜찮은 기업들은 임금도 괜찮게 준다.
그리고 회의실로 이동하는 동안에 휴게실과 회의실이 잘 갖춰져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라. 개발자들은 이미 휴식 공간과 회의실, 먹거리가 직원들의 만족과 업무 효율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게 잘 갖춰져 있지 않다면 사장의 마인드가 나쁘거나 혹은 돈이 부족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 이는 악순환 기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회사 안에 수면실이 갖춰져 있는 경우라면 그 수면실 상태를 한번 지켜보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면 복지에 신경을 쓰는 좋은 회사고, 너저분하고 냄새가 난다면 야근을 전제로 스케줄이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악순환 기업의 몇 가지 전조에 대한 것으로 100% 신봉해선 안 된다. 휴게실에 먹거리가 넘치고 평균 근속 연수가 5년이 넘는데도 사실 악순환 기업일 수도 있다. (월급을 못 줘서 초코파이를 채워 넣고 5년이 넘은 사람들은 다들 갈 곳이 없어서 억지로 눌러앉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반대로 휴게실 없고 회의실이 따로 없는 퀴퀴한 사무실인데도 실제로는 알짜 기업일 수도 있다. 그러니 위 체크리스트는 어디까지나 참고만 하고 인맥을 통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모으도록 하자.
욕심이 없으면 사기도 당하지 않는다.
서두에 4년간의 열정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사람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애당초 그 당시엔 시장이 워낙 작아 업계 전체의 연봉 테이블이 낮았고, 당시 내가 받던 1200이라는 초봉은 고졸에 병특 대기자라는 신분을 생각하면 파격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연봉을 깎아가며 모바일로 옮긴 것도 크고 멀쩡한 회사에는 병특이 나오지 않거나, 이미 병특을 받을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병특도 못 받고 빚만 진 채로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채 군대에 끌려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착취로 몰아넣은 것은 내 욕심이었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열정 하나만 믿고 대학을 반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업계에 뛰어들어 4년간 착취당할 동안 군대에 갔다 와서 학교를 마친 친구는 이미 업계의 대기업에서 내가 받던 연봉의 두 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과거 열정이 있으니 일하면서 배우겠다는 말이 통했던 것은 열정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인건비가 싸서 실력은 둘째치고 일을 하겠다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일도 돈을 주면서 배울 수는 있어도 돈을 받아가며 배울 순 없다. 실력이 부족하지만 일 하면서 배우겠다는 것은 분명히 부당거래다. 그리고 기업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만일 기업이 이 부당거래를 받아들이거나 제의한다면, 그건 이 부당거래가 기업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전체 인건비가 올랐는데도 열정 착취로 운영되는 회사가 존재하는 것은 정당한 임금을 받기엔 실력이 부족한 친구들이 일을 하고 싶어서 저 부당거래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면 저 부당거래에 발을 담그지 말고 먼저 준비를 한 뒤에 정당한 거래를 하자. 열정 열정 그러는데 2년 동안 착취당할 열정이 있다면 왜 열정을 포트폴리오 만드는 데 사용하지 못하냔 말이다.
뽀너스. FAQ
Q : 그래도 좋은 회사 가려면 좋은 대학 나오고 스펙을 갖춰야 하지 않나요?
A : 흔한 착각이긴 한데, 이 업계는 정말로 학벌이나 스펙을 거의 보지 않고, 순전히 능력과 실력, 성향을 중시한다. 심지어 토익 점수도 보지 않는 것이 이 업계다. 참고로 글쓴이는 토익, 토플, 텝스 등 공인 외국어 시험을 전혀 보지 않았지만 외국계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Q : 에이, 그래도 주변에서 N 모 회사 들어간 사람들 보면 다 좋은 대학 나왔던데요?
A :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통계적으로 커리큘럼이 좋고 교육 수준이 높은 학교라면, 보다 실력이 좋은 친구를 배출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인맥을 타고 추천을 받을 기회도 많다. 하지만 결국은 실력이지, 학교 이름을 보고 뽑는 것은 아니다. 예외적으로 신입공채의 경우 워낙 지원자들이 고만고만해서 ‘학교라도 잘 나온 친구들이 그나마 국영수는 잘하겠지’라는 이유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다.
Q : 그럼 게임 관련 학과를 나오면 좋겠네요?
A : 게임 관련 학과에서 배우는 것들이 게임을 제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프로그래밍 같은 경우는 게임 전공보다는 오히려 컴공에서 배우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학교를 다니면서 포트폴리오로 사용할 게임을 만들어볼 수 있고, 업계 출신의 교수진이나 먼저 진출한 선배들로부터 정보를 공유 받고 추천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유리하다. 참고로 글쓴이도 게임 관련 학과 출신이다.
Q : 그럼 꼭 대학을 나와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A : 독학으로 언리얼 엔진 3급의 엔진을 혼자 만들 수 있거나 90년대 말 ~ 2000년대 초반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대학을 안나와도 충분히 개발자로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한다. 당장 프로그래머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기본기가 두고두고 바탕이 되고, 그 외 직군도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 대학에서 배우는 것들이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통계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데이터 분석에 유리하고 사학을 전공했으면 컨텐츠 기획할 때 도움이 된다. 범죄만 아니라면 세상에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 부가적으로 조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요즘처럼 대졸자가 많은 상황에서 고졸자 이력서를 받게 되면, 이 친구는 혹시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국영수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건 아닌지 의심을 품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운 편이 아니라면 대학을 가는 편이 낫다.
Q : 게임회사 다니면 골드나 뭐 이런 걸 무제한으로 쓸 수 있나요?
A : 회사에 따라서 자사 게임의 무료 계정을 주거나(월 정액제 게임일 경우) 게임 머니 / 캐쉬 쿠폰을 주기도 하는데 (부분유료화 게임의 경우), 딱 거기까지다. 담당자 외엔 남한테 아이템을 꽂아주거나 돈을 뿌려줄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고, 담당자가 그 짓을 하면 짤린다.
Q : 게임회사는 매일 밤 철야하고 다음날 오후 늦게 출근하나요?
A : 야근은 정말 회사 별로 팀 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일단 확실한 건 악순환 기업은 야근의 빈도가 월등히 높고 정시퇴근을 죄악시 할 확률이 높다. 앞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인력을 더 보충할 생각이 없거나 보충하고 싶어도 인력이 잘 들어오지 않아 만성적으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악순환 기업이 아니라도 프로젝트 일정을 타이트하게 (혹은 대충) 잡거나 임원 마인드가 좀 낡은 곳은 퇴근할 때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회사 규모가 크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을수록 퇴근시간이 잘 보장된다. 대기업이라도 프로젝트 상황에 따라선 부득이하게 야근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마감이나 정기점검 등이 닥칠 경우는 큰회사건 작은회사건 악순환 기업이든 간에 야근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