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도래했으나 고향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켜달라고 했더니 정식으로 직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국내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회사였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었다. 스스로 운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게임이 나오기도 전부터 월급이 6개월씩 밀리고 정작 출시한 게임은 불법 복제 때문에 망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들 온라인 게임으로 향할 때 패키지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PDA라는 것을 손에 쥐자, 미래가 손바닥 안에 있음을 예감했다. 그때도 몰랐다. 내가 만든 게임이 수백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는 대 히트를 칠 줄은. 그리고 을도 아닌 병으로 납품한 거라 나는 돈방석은커녕 다시 월급이 연체되어 빚방석에 앉을 줄은.
4년간 연봉은 1,400만 원을 넘지 못했고, 실제 근무시간으로 나눠보니 맥도날드 햄버거 뒤집는 게 차라리 벌이가 더 나았다. 그래서 군대에 가기 전에 포트폴리오를 전부 불태워버리고 잠을 아껴가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뭐 갔다 와서 보니 할 줄 아는 것이 게임 만드는 것뿐이라 다시 게임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나름 패키지 시장의 끝물부터 모바일까지 고전적 열정착취를 당했던 터라, 팝픽 사태를 보니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중 ㅍㅍㅅㅅ에서 게임 업계를 위한 취업 가이드 같은 건 없느냐는 글을 보니 이거다 싶었다. 물론 ㅍㅍㅅㅅ 필자 모임에 꼽사리 껴서 술을 얻어먹은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어쨌든 그래서 한번 지망생을 위한 게임업계 취업 가이드를 써보기로 하겠다. 글 쓰는 사람이 기획자라 기획 쪽으로 치우칠 순 있으나, 가급적 다른 직업들도 포괄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
게임 업계의 인력 채용 구조
최첨단 IT 산업으로 치켜세우긴 하지만, 게임은 기본적으로 노동 집약적 산업이다. 기획,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 어느 것도 기계나 프로그램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또한, 납기일, 속도 등 정량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다른 IT와 달리 재미, 감성 등 정성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만큼, 작업자의 숙련도와 성향이 크게 중요해진다.
그래서 비슷한 규모의 다른 업계와 달리, 게임업계는 일반적으로 정기 공채를 진행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진행하고, 각 팀별로 사람이 필요하면 수시로 채용한다. 당장 N으로 시작하는 회사 홈페이지에 가서 ‘구직’ 혹은 ‘Career’를 눌러보면 지금도 여러 팀에서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앞서 말한 것처럼 작업자의 숙련도와 성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입을 데려와 키우기보다는 경력자들을 채용하려 한다.
여기서 많은 지망생들이 큰 회사들은 신입을 뽑지 않으니 작은 회사에서 신입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겠다는 스마트한 오해를 하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열정착취가 시작된다.
아무리 숙련도가 중요하다고 해도 1년 차가 해야 할 일이 있고, 3년 차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5년 차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연차와 실력에 맞지 않는 업무를 시킬 경우 업무 효율이 오히려 더 떨어진다는 연구 사례를 본 것도 같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넘어가자. 어쨌든 신입이 할 일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소규모지만 신입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있고, 경력자에 비해 드물긴 하지만 분명 채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저렇게 드문드문 진행되는 신입 채용을 통과한 사람과 통과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 실력 차가 굉장히 큰 것도 아니다. 어차피 업계에선 신입에게 대단한 업무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만한 일도 시키지 않으며,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종이 한 장이 당락을 가르는데,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이 종이 한 장이 어떻게 생긴 건지를 모른다. 그러니 막연하게 아 큰 회사는 커리어를 시작하기 힘드니까 작은 회사로 눈을 돌린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열정착취로 가는 지름길이다.
작은 회사와 악순환기업은 다르다.
지속적으로 ‘작은 회사’와 열정착취를 이야기하다 보니, 마치 N으로 시작하지 않는 회사에 가면 무조건 열정착취 당한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우리는 작은 회사와 열정착취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악순환 기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앞서 게임을 만드는 데엔 인력의 질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질 좋은 인력을 끌어들이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임금이다. 또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업계 특성상, 회사 운영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인건비이다. 즉, 게임회사는 급여가 바로 R&D 비용이 되며 경쟁력이 된다.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 간에는 자본력에서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급여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에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최근은 스마트폰 붐을 타고 기존의 개발자들이 투자받아 독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기업들은 작아도 인건비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완전 염가로 후려쳐서 신입들로 회사를 꾸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엔 경영자가 인건비에 대한 인식이 낮거나, 자본이 너무 적은 관계로 최저임금에 가까운 낮은 임금을 줄 수밖에 없는 회사들이 있다. 이런 회사들은 인건비가 낮기 때문에 질 좋은 인력을 유치할 수 없고, 그 인력의 질이 게임에 반영되어 시장에서 성과도 좋지 않고, 성과가 좋지 않으니 수입도 신통찮고, 그러니 급여가 높아지지 않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나마 일하던 사람들도 더 나은 회사를 찾아 옮기거나 아예 업계를 떠나는 등 인력이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반면 사람을 더 뽑을 여력이 없거나, 사람이 오지 않으므로 2~3명이 해야 할 일을 1명이 떠안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야근은 필수고 철야는 옵션이 된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급여를 받으면서. 우린 이걸 네 글자로 열정 착취라고 한다.
기본을 묻지 않는 회사는 악순환 기업이다.
몇 년 전, 어느 동호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게임 업계에서 일한다고 하니 상담을 구한 적이 있었다. 모바일 게임 회사를 다니는 친한 형이 기획자가 부족하다고 오라는데 어떠냐는 것이다. 제일 먼저 되물었던 것은 급여였는데 역시 연봉 1500이 안되는 금액이었다. 그 다음은 그 전에 게임을 만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혹시 게임에 대해 분석글 같은 것을 써본 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이 역시도 없었다. 전형적인 악순환 기업의 채용 방식이다.
아까 업계에선 신입을 잘 뽑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 신입은 경력자보다 채용하기가 어렵다. 경력자라면 이전 참가했던 게임들이 포트폴리오가 된다. 또 어차피 이 바닥이 한 사람만 거치면 다 아는 사이이다 보니 이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 찾아서 능력과 성향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고 (업계 용어로는 레퍼런스 체크라고 한다.) 반면 신입은 이런 것이 없으므로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고, 그 뒤 면접에서 집요하게 성향과 능력을 캐물을 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말이다.
그렇다고 뭔가 굉장히 월등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신입은 키워서 써야 할 재목일 뿐이다. 사실 업계에서 보는 것은 ‘기본기’이고 이 기본을 쌓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다. 기본이 잘 되어있는 지망생들은 대기업이나 작지만 좋은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다. 악순환 기업들은 그런 친구들을 끌어들일 수 없기 때문에 기본이 부족한 친구들을 채용하고, 또한 이런 친구들이 마음만 앞서면 악순환 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 기업은 이직할 때에도 불리하다.
사실 악순환 기업보다 임금을 포함한 근무 여건이 좋은 회사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지망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지원하는 것은 그런 회사에선 신입을 뽑지 않고 경력자만 뽑으니(이는 오해라고 이미 이야기했다.) 우선은 받아준다는 곳에서 2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에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건 사실 악순환 기업은 경력을 쌓고 이직하기도 불리한 점이 있다는 점이다. 어차피 경력자도 이직하려면 면접을 보고 실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경력 2년은 경력자 수시 채용에 지원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일 뿐, 이직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악순환 기업은 실력을 키우기에 적당한 환경은 아니다.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당장의 실력은 부족해도 일단 현장에서 실무를 하면 금방 경험을 쌓고 레벨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마치 쪼렙이 불지옥으로 혼자 뛰어들어서 폭풍렙업을 하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옆에 붙어서 템도 나눠주고 이것 저것 팁도 알려주며 안 되겠다 싶을 땐 대신 몸빵도 해주는 고렙 친구랑 파티를 맺어야 레벨이 쑥쑥 오르듯이, 잘 돌아가는 회사에선 사수를 붙여서 꾸준히 가르쳐가면서 사고를 쳐도 수습이 가능한 일부터 차근차근 성장시켜나간다.
반면 악순환 기업은 이런 사수가 없다. 생각을 해보라. 당신이 이 회사에서 2년 경험을 쌓아 이직할 계획을 세웠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누군가 그 계획을 실행했기 때문에 빈자리가 난 것이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당신을 뽑았다. 그러니 당신의 사수가 되어줄 사람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혼자서 2명분의 몫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밀하게 보살펴주기 힘들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밀려드는 업무를 혼자 떠안다 보면 아무래도 실력이 는다기 보다는 요령만 느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애초부터 능력과 소질이 있는 굇수들은 오히려 고렙 몹들을 때려잡으면서 광렙을 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런 친구들은 악순환 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필요가 없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결국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악순환 기업에서 한번에 좋은 회사로 점프하진 못하고, 비슷하지만 조금씩 더 나은 조건을 찾아서 이직하게 된다. 그렇게 환승을 반복하다 보면 본인의 소질과 노력, 인맥 등을 합쳐서 최종적으로 대기업에 합류할 수도 있다. 굉장히 힘이 들겠지만. 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악순환 기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기 보다는 본인이 자격을 갖춰서 좀 더 좋은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편이 낫다.
다음 회에서는 게임회사 취업에 필요한 것과, 어떻게 커리어를 시작하는 게 좋은지 다뤄 보도록 하겠다.
게임업계 취업 가이드 2. 필요한 능력과 이력서/포트폴리오 작성법
게임업계 취업 가이드 3.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취업 선택
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