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은 변함없다
이전 글에서도 여러 차례 밝혔듯이, CSR에 대한 오해는 CSR을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사회에 지는 책임이라는 원래 뜻이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으로 좁혀서 해석하는 오류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마케팅 구루인 마이클 포터조차도 그런 오류를 범했고, 그런 오류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이 CSV다. (“CSV는 환상이다“) 이 글로써 CSV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별로 없다.
최근에 보니 CSV도 시들해졌는지, TSV라는 용어가 새로 나왔다. 통합공유가치(Total Shared Value)라고 하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통합공유가치, CSR과 CSV에 대한 논란의 종식“) 내가 유독 독해력이 떨어지는지…
링크된 내용에 따르면, 2015년 말 런던에서 ‘CSR은 죽었나?’라는 회의가 열렸는데, CSR은 아직 죽지 않았으며(!), CSV는 사회에 대한 비즈니스 접근법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단다.
이 회의내용을 본 저자는 CSR, 지속가능성, CSV의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요소를 “통합공유가치(Total Shared Value)”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TSV를 구성하는 요소 세 가지는 주장은 ① 법, 규제, 윤리 경영, 기업 원칙과 정책 등 책임 있는 비즈니스 행동을 준수하는 것, ② 환경적 지속가능성, ③ 가치창출 이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저자는 학자도 아닌 실무자 출신이라는데 무슨 얘기를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좀 지겹더라도 CSR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Carroll의 피라미드를 다시 보자.
TSV 구성요소를 이 피라미드에 대입해 보자. ① 법, 규제, 윤리경영, 기업원칙은 법률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② 환경적 지속가능성 역시 속속 필요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제도화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법률적, 윤리적 책임에 포함된다. 이걸 달리 생각한다면, 앞으로 인권, 여성, 정치적 중립성 등등 온갖 가치를 개별적으로 투영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③ 가치창출은 당연히 경제적 책임의 핵심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TSV란 CSR을 자선적 책임으로 좁게 해석해 놓고, 나머지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CSV를 ‘창안’할 때 보여준 잘못된 그 방식–의 재탕이다.
포용적 기업(Inclusive Business)과 CSR, 사회적기업에 대해서는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은 CSR만 붙들고 송강호 스타일로 얘기하고 싶다.
CSR은 생각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다
똑같은 얘기를 계속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그냥 “CSR을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하고 지켜나가자”는 주장이 너무 밋밋하려니 생각해서, 오늘은 최근에 유행하는 카드뉴스와 비슷한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CSR이 만만하게 보이니까 온갖 비스무리한 개념을 만들어 가면서 집적거린다.
그런데… 정체를 알고 보면 사실 이랬던 거였다. (그나마도 배가 잘 안 보일까 봐 확대한 거다…)
그렇다. 우리는 눈에 쉽게 보이는 기업의 자선활동(사회공헌활동)만을 CSR로 착각하는데, CSR의 본체는 수면 아래 잠겨서 잘 보이지 않을 뿐, 무지무지 매우 훨씬 더 중요하다.
진짜 중요한 것에 관심을 주자
국내에서 최근 사례를 들어보자.
LG전자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사회공헌활동을 꾸준하게 하는 기업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2015년 말 그 유명한 ‘신입사원 명퇴’ 시기에 조용히 CSR팀마저 없애 버렸다. CSR 업계에서는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춰 두 기업을 비교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LG그룹이 독립군 군자금을 대던 유일한 재벌기업이다, DMZ에서 중상을 입은 군인과 순직한 교통경찰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주었다, 의로운 일을 한 병사를 특채한다 하는 미담도 좋다. 사회공헌활동을 조용히(!)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도 칭찬할 일이다.
하지만, LG전자의 이런 모습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2010년과 비교해 2014년 매출액이 47.9% 증가했지만 정규직은 되레 0.38% 감소하고 있을 때, LG전자는 매출액이 0.68% 감소했는데도 정규직 비율이 16.3% 증가했다. 삼성전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23.0%이고, LG전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11.1%다. (업종이 같아야 비교 가능해서 삼성전자와 비교했다.) LG전자는 전체 고용 면에서도 항상 최상위권이다.
이런 것이 바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다. 적법하게 기업을 운영하면서 질 좋은 고용을 유지하는 통상적인 기업활동의 중요성은 일시적으로만 눈에 띄는 자선활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두산인프라코어가 CSR팀을 없앤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수천 명을 구조조정(해고의 수사적 표현)한 것은 심각하다. 기업 자체가 무슨 부실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지금도 영업이익을 해마다 수천억씩 내는 회사다. 경영 오판으로 인수한 미국 대기업 밥캣 덕분에 진 빚이 문제였다. 이자비용이 영업이익을 넘어섰다. 그걸 만회하려고 비용 가운데 인건비를 줄이기로 한 것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어쩌다 위기를 맞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사람이 미래다’라며 광고했던 것을 두고, 구라쟁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건 약과다. 우리는 정색을 하고 그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해야 한다. 수천 명의 정리해고자와 그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기업으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용의 양과 질을 늘려온 LG전자와 비교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CSR 업계에서 자선활동보다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주제다. 연말마다 ‘올해의 멋진 자선활동’을 뽑아서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기업을 찾아 표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우존스 지속가능성 지수(DJSI, Dow Jones Sustainability Indices) 같은 걸 좀 더 보강한 새로운 기준이 마련되면 좋겠다. (하긴, LG전자가 2015년 9월 말 기준 내구성 소비재 부문에서 DJSI 세계 1위 업체이고, 국내에서 각종 사회공헌활동상도 많이 받는 기업이긴 하다…)
두산인프라코어 역시 시간이 좀 지나면 사회공헌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해외출장 중에 DOOSAN 로고를 달고 있는 중장비를 만나더라도 예전만큼 반가울 것 같지 않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장기간 고전하던 LG전자의 신제품 G5가 전문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시장에서도 선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CSR에 대한 무의미한 논란과 그 논란을 이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원문: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