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로 시작한다. 아래 박스에서 빨간색 박스 안에 들어가는 2가지 단어는 무엇 무엇인가?
죄송하다. 정답은 ‘공유가치창출’과 ‘CSV’다. 이 글 제목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더 뻔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저 빨간색 칸에 ‘경영혁신’을 넣으면 어떤가? ‘리엔지니어링’이나 ‘식스시그마’를 넣으면 또 어떻게 될까? ‘신규사업 개발’은? 아니면, ‘창조경제’나 ‘녹색성장’으로 범위를 넓히면 문맥이 이상해지는가? 내가 보기에는 다 문제가 없다. 뭘 넣어도 문제가 없다면, 저 전략프레임 10단계는 백종원의 만능 간장이란 말인가?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라. 모든 단어가 ‘개념어’다. 개념을 나타내는 추상명사만 줄줄이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으로 딱 집어서 뭘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도 컨설턴트지만) 컨설턴트들이 하는 일이 대략 이렇다. 컨설턴트는 현실에서 문제를 찾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직업인데, 현실이 꼭 문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문제가 없으면? 문제를 만들면 된다.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이슈를 제기해 주면 최상이다. 그 이슈를 선점하고 있으면 고객이 찾아온다. 그래서 온갖 유행이 생겨나고 전파된다. 그럼, CSV는 어쩌다가 생겨났나?
CSV는 오해에서 생겼다
CSV는 마케팅의 구루로 추앙받는 마이클 포터가 한 논문에서 만들어낸 조어(造語)다. 이제는 거의 그의 브랜드가 되었다. 그런 그가 CSR에 대해 오해를 하고 CSV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문제가 퍼졌다.
즉, 포터는 CSR을 ‘기업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사회공헌활동’으로 매우 좁게 (결과적으로 틀리게) 이해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기업 본연의 경영활동인 경제적 가치창출에 집중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CSV다. 그러니까, 포터의 CSV는 본연의 CSR을 뒤집는 얘기가 아니라, CSR의 가장 기본인 경제적 가치창출 기능으로 사회에 기여하자는 얘기였다.
특히, 포터는 시장을 확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논문에서 BOP(Bottom of Pyramid, 저소득층) 시장을 언급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소득층도 소비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으면, 그 자체로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사회적 경제를 설명하면서 써왔던 그래프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BOP 시장 개발이 개발협력에서 가지는 기능은 가치등가곡선 위에서 상대적 위치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 자체를 아예 바깥쪽으로 이동하여, 총 가치를 늘리자는 얘기다.
위 그림에서 보듯, 시장이 확장되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 모두 늘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CSR은 봉사하고 기부하는 사회공헌활동이 아니다. CSR은 기업활동 전 범위에 포괄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이다. 다시 CSR의 창세기로 돌아가 보자.
Carroll이 만든 이 피라미드야말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피라미드를 아래와 같이 오해하는 일이 잦다.
위 그림에서는 캐롤 피라미드에서 2단계인 준법이 4단계인 자선으로 발전(?)했다가, 이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전체 체제인 CSR로 환원되었다가, 급기야 CSV로 승화(?)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오해다.
캐롤의 CSR 피라미드는 사회적 책임 사이의 순서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선 성장 후 분배’라는 식의 사고가 아니다. 동시에 다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기업이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의 본질에 더 가까운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경제적 가치만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지만, 경제적 가치로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기업은 다음 단계를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폭스바겐 사태를 보자. 폭스바겐의 사회공헌 활동은 절대 적지 않다. (폭스바겐 사이트 참고) 그러나, 이제 다 필요없게 되었다. 법적 책임을 지지 못하고서는 경제적 이윤 창출도 기부활동도 다 공염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 도대체 왜 우리는 CSV에 열광하는가?
다른 나라에서는 CSV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한다. 포터 자신도 유독 한국이 CSV에 빠져드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포터 상이 뚝딱 만들어져서 시상자로 오는 포터의 마음은 어땠을까?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딴 상이라… (이 시점에서 마론파이브가 한국 팬들이 콘서트에서 ‘떼창’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는 얘기가 생각나면서, 혹시 한국이 열광하는 ‘습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가설을 만들어 본다…)
여기에는 유력한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아전인수’설이다. 국내 기업의 경영진은 사실 CSR에 대해서 잘 모른다. (물론, Carroll도 모른다) 그냥 기부를 해야 하는 건가 하면서 따른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CSR=사회공헌활동이고, 일종의 ‘준조세’다. 이런 경영진에게 마이클 포터는 너무 잘 알려진 사람이다. 마케팅의 단군 할아버지 아니신가. 이런 분이 경제적 가치창출 운운하면서 CSV라는 신조어를 내려 주셨는데, 원문에 ‘integral to profit maximization’이라는 문구까지 등장한다. 아, 이건 돈이 되는 거구나!
이런 착각이 일거에 CSR팀을 CSV팀으로 바꾸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혹은 top-down 방식으로, 혹은 (알아서 기는) bottom-up 방식으로 추진되었다지만, 어쨌거나 국내 유수 대기업 CSR 담당 간부의 증언이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가설은 ‘자가발전’설이다. CSV를 전파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위한) 이익창출 활동인 사람들, 즉 컨설턴트들이 도입했다는 것인데, 이건 내 추측이다. 원래 컨설팅펌들은 씨뿌리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유행을 만들어 낸다. 그 유행이 확산되는 시기가 컨설턴트들의 수확기다. 요새가 국내 컨설팅펌들에게는 보릿고개라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CSV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아주 무식한 기업이 되는 거라고 설파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모듈을 만들어 냈을 터이다. 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늘 보는 ‘혁신’ 프로젝트 상차림에 CSV라는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일이었을 것이니까…
이런 데서 한발 더 나가면, CSV는 아주 창의적인 분야로 재탄생한다. CSV 정의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그 실천에 있어 갖은 방법론을 ‘상상’하는 분들이 많다. 온갖 좋은 걸 다 가져다 붙이니 ‘봉황’이 된다. 몸의 앞쪽 반은 기린, 뒤쪽 반은 사슴을 닮았고,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은 것이 바로 봉황이라고 하니, 온갖 방법론으로 치장한 CSV는 봉황의 반열에 들만 하다. 그리고 진짜 존재하는 거라고 주장하면서 봉황을 그려서 시장에 내다 판다.
CSR이든 CSV든 기업은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
기업은 캐롤의 CSR 피라미드에서 아래 2단계 ? 경제적, 법적 책임 – 만 잘 지켜도 표창을 받는다.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경제적으로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업이 사회에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여다. 고용하고, 세금 내고,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한다. 거기다 법까지 잘 지키면, 매우 칭찬할만한 기업이다. 선진 기업은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도덕적 책임과 자선활동까지 신경 쓰는 것이다.
최근에 세계 최강이라던 국내 조선 3사가 줄줄이 대규모 적자를 냈다. 그 여파로 대규모 구조조정 ? 대량 해고의 수사적 표현 ? 을 감행한다고 한다. 적자를 냈으니 앞으로 한동안 세금도 안 낼 것이다. 주위에서 일하던 수 많은 하청사들도 힘든 시기를 맞을 것이다. 조선 3사는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CSR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제적 책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이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CSR을 기부활동으로만 좁혀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 기부금과 법인세를 비교해 보라. 직원들의 소득세와 하청사들의 매출, 법인세, 소득세까지 생각하면, 조선 3사가 저지른(?) CSR 위반은 엄청나다. 우리는 기술개발을 게을리 하고, 시황을 못 읽고, 무리한 수주를 해서 적자를 내는 기업을 비난해야 한다.
법적인 책임? 이건 말할 나위도 없다. 횡령, 배임, 뇌물… 우리나라 재벌들의 주요 죄목이다. 그 규모와 죄질로 보건대, 미국 같았으면 평생 햇빛 보기 힘들었을 사람들이 환자 코스프레와 자기 이름을 내건 사학재단에 대한 기부 퍼포먼스, 사회적기업과의 파트너십 쇼 등으로 줄줄이 사면, 복권되었다. 다시는 사면 같은 건 없다던 정치권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면을 해줬다고 변명한다. 경제사범 사면해서 경제가 살아날 것 같으면, 성폭행범 사면하면 밤길이 안전해지느냐고 묻던 어떤 네티즌 생각이 난다…
기업은 CSR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 본연의 책임에 충실하길 바란다. 합법적으로 양심적으로 일해서 이익을 많이 내라. 그것만으로 기업이 사회에 져야 할 대부분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다.
CSV는? 당분간 잊어 주시라.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