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게임이었다 – 나는 왜 여성 게이머가 되었는가?
여성 게이머의 유년기를 함께한 90년대 게임들 총망라에서 이어집니다.
나를 가르친 망친 코에이의 역작과 함께한 중학교 시절
중학교까지는 적당히 집에서 돌아갈 수 있는 게임들을 친구들과 교환했다. 이때의 게임 입수의 루트는 용산 던전과 친구들 사이의 암흑 마켓이었다. 친구들은 천사의 제국 같은 게임을 복사해서 같이 놀았다. 당시는 암호표가 있었는데, 이를 문구점에서 복사해주지 않아서 몇 군데만 외워서 플레이한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나에게 프린세스 메이커2와 심시티 2000, 삼국지3, 이스2 스페셜 같은 게임을 사주셨다.
나는 프린세스 메이커2 는 그 당시 게임챔프 공략을 보고 잘못된 점을 찾아 독자 엽서를 보낼 정도로 집요하게 즐겼으며, 삼국지는 겨울에 샀는데 마덜의 회상으로는 ‘애가 보일러 뺀 마루 구석에서 이불을 두르고 라볶이를 해먹으며 눈이 뻘게지도록 게임을 하고 있는데…’ 라고 한다. 아 될성부른 덕후는 중학생부터 이 모양이구나.
펜티엄이 슬슬 보급되고 국내의 삼성, 엘지 등에서 컴퓨터 보급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쯤 해서 나보다 좋은 사양의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주인집 아들은 삼보의 펜티엄 100MHz 16M램의 컴퓨터를 가지게 되었다. 근데 어째 나는 패미콤 준 것도 억울한데 그 집의 컴퓨터 수리 셔틀이 돼야 했었다.
내 컴퓨터에서 윈도우 게임은 돌아가지 않았지만 윈도우 95라는 운영체계가 아직 도스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었기는 한데, 사양의 한계로 느릿느릿 돌아가는 게임이라던가 점점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적어지던 그 암흑세기말에, 주인집 아들놈이 자기는 무슨 게임인지 모르겠다며 디스켓 2장을 가져왔는데 이거슨,
대항해시대2는 칸노 요코의 처음 오프닝 사운드부터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그 당시의 나는 이미 마르고 닳도록 했던 게임에 질려 있던 터에 새롭고 파고들 여지가 많아 보이는 게임에 눈이 돌아갔다. 그해 여름은 밤낮없이 매우 뜨거웠고, 내 컴퓨터 CPU도 대략 뜨거웠고, 잉여 교과서인 사회과부도는 재평가 받게 되었다. 위도 경도 찾는 법이라든가, 세계지리를 알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회과부도는 대항해시대 3편이 나오던 고등학교까지 그 가치를 계속해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약간 장난식으로 썼지만 지금도 혹시 아직 안 해본 가이들이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게임이다. 윈도우 7에서도 도스박스 버전으로 잘 돌아간다.
펜티엄의 등장과 디아블로의 충격! 고로케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도 펜티엄 133MHz 램 16메가의 삼성 펜티엄 컴퓨터(매직스테이션)와 프린터가 생겼다. 사실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만 마덜이고 빠덜이고 그 말을 절대 믿지는 않으셨을 것 같다(…). 지금 기억에 내 거지 같은 옵티머스 뷰만 못한 것이 250만 원이나 했고, 마덜은 그 컴퓨터 할부금을 꽤 오래 갚았지 않았을까…
나는 당연히 온갖 윈도우 버전 게임들을 신나게 돌려보았고, 그 당시는 PC98 버전 게임부터 해서 많은 게임이 PC로 컨버젼되고 창세기전, 프로토코스 같은 국내 개발게임도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였다. 하이리워드, 요정전설, 졸업, 뿌요뿌요 같이 여자들에게 장벽이 낮은 게임들도 있었고, 워크래프트가 전략게임 덕후들에게 어필하던 시기였다. 어떤 친구들은 각종 어드벤처와 북미 RPG를 섭렵하며 쓸데없는 thou 같은 단어가 대부분… 영어 실력까지 날로 꽃피워 나갔다. 혹은 주인집 아들은 캠퍼스 러브 스토리 같은 게임을 가지고 와… 아 야겜 특집이 아니구나.
이 당시 게임들이 사양은 높아지고 도스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것들이 있어서 기본 메모리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컴퓨터 자체를 파고들다가 컴퓨터 너드가 되는 테크를 밟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게임개발자’ 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던 1996년.
졸라 짱센 디아블로가 던전에서 울부지저따.
96년 발매했는데, 국내에는 97년으로 기억한다. 게임 잡지에서 언급하기는 했었지만 나름 18금 등급을 달고 나왔었고, 중학교 선도부에 학교 내에서 압수된 1카피가 있어 그 모습을 알현할 수 있었다. 지금의 디아블로 시리즈가 시스템적으로 더 재미있고 잘 짜였는지 몰라도 1의 그로테스크하고 악마적인 공포 분위기는 블리자드 개발자 놈들이 죄다 악마에게 혼을 팔아 블리자드를 키웠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의 놀라운 충격이었다.
우리는 모두 던전에 들어가서 도살자에 썰리고, 서큐버스한테 맞아 죽고, 디아블로의 아포칼립스에 떨어져 나갔으며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디아블로가 되어갔다. 그야말로 97년의 여름방학은 디아블로와 내내 함께였다. 남들이 중학교 여름방학에 연애하고 그러는 동안… 난 그런 거 업ㅋ엉ㅋ.
첫사랑의 풋풋함도 안생겨요 없이 PC방과 함께한 고등학교
고등학교 때도 나의 상태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고, 게임들이 고사양화 되면서 소위 업그레이드 욕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1을 기점으로 게임잡지들은 슬슬 망테크를 타고 있어서 무료부록을 경쟁적으로 뿌리고 있었고, PC 패키지 게임 시장의 위기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고등학교쯤 오자 이미 각자의 테크를 타고 온 게이머 친구들이 서로 게임을 공급하고 취향이 확연히 갈리기 시작했다. 문명 같은 게임을 접한 것도 이 무렵인데, 공부량이 늘고, 게임량도 느니까 항상 잠은 부족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되었고, C&C(커맨드 앤 컨쿼)의 팬들과 각축을 벌이고 있었는데, 98년 말에 스타크래프트의 확장팩인 부르드워가 나오면서 RTS 계가 어느 정도 평정되고, PC방 산업 부흥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인터넷 인프라의 발전 흐름을 타고 각종 FPS게임들도 출시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레인보우 식스가 인기가 있었다. 스타나 레인보우식스는 딱히 게임 덕후가 아니더라도 조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피시방에 모여서 게임을 즐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멀티미디어 부’가 있었는데 일종의 전산부 비슷한 것이었고, 각 반에서 거대한 TV나 PC 같은 것이 들어있는 학습보조 멀티박스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 활동으로 할 게 없어서 교사의 인솔에 따라 근처 PC방을 가서 방과 후의 중학생들과 스타나 레인보우식스를 하고는 했다. 어느 날인가에 방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아군끼리 싸우느라 못 나가고 있는 것이 짜증이 나서 과감하게 방에 수류탄을 던진다던가, 같은 부원들끼리 스타를 하다가 서로 멱살을 잡는다든가 하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던 것 같다.
나는 RTS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어서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그 게임이 2가 나오고 다시 2년이 지나 확장팩 군단의 심장이 나오는 나이가 될 줄이야…
리니지 1 같은 온라인 게임도 나오고 있었고 초기의 한게임은 막장이어서 미성년자들도 화투를 칠 수 있었지만, 여기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대신 그 당시는 이미 황혼기가 벌써 지나버린, 그러나 과거에 내가 너무 하고 싶어서 책을 여러 번 보며 플레이를 꿈꿨던 많은 콘솔게임의 에뮬레이터 프로그램이 나와서 과거에 비싸서 구경도 못했던 게임기와 그 게임들을 간단한 파일을 설치하여 PC에서 놀 수 있게 됐다. 파이널 판타지나 전설의 오우거 배틀 같은 게임은 인기가 많아 이미 한글화도 되어있었고, 나의 학창시절 황혼기에 내 컴퓨터는 나와 수많은 게임을 함께 하며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 컴퓨터는 딱 고등학교 3학년 직전에 맛이 가 버릴 때까지 – 컴퓨터가 맛이 간 그 3학년에 하필 디아블로 2가 나왔다. – 맹렬히 나의 청소년기를 불태웠다. 마덜과 친구인 주인집 아줌마가 ‘우리 아들은 컴퓨터 사줬는데 잘 하지도 않아서 돈 아깝다’ 고 하자 ‘쟤는 온종일 붙들고 있어서 본전 뽑은 것 같다(……)’ 라고 했으니 이건 좋다는 것일까 나쁘다는 것일까? 답은 알고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게임 라이프…
나는 나중에 졸업 후 확장팩이 나오고 나서야 내 힘으로 컴퓨터를 사서 디아블로2를 플레이할 수 있었고, 1~2년 정도는 디아블로2에 빠져있었다. 그때는 포트리스2, 리니지와 각종 국산 온라인 게임과 초기의 소셜 네트워크 같은 만남 사이트나 퍼즐, 퀴즈 게임도 유행을 했다. 하지만 나는 컴퓨터로 제일 먼저 ‘대항해시대2’ 를 돌렸다. 그때까지는 패키지 게임들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정식 수입, 혹은 악튜러스 같은 것이 국내 발매되는 황혼기였다. PC게임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도 과거의 게임을 다시 돌려보면서 즐거웠던 때를 돌아봤다.
그 이후로 콘솔이 정발 되는 시대를 거쳐 많은 게임을 했고, 스팀으로 PC게임들이 새 생명을 얻는 시대도 오고, 디아블로3 확장팩과 내일 군단의 심장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나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전문적인 게임 정보보다는 혹시나 서로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게임들에 대해서 같이 추억을 나누고 싶었고, 다 적고 보니 이렇게 많이 적었는데도 말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아마 보면서 ‘이 정도는 가소롭군’ 하는 게임계 고수도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잠시라도 게임 하는 여러 가이들이 자기 하드디스크나 컬렉션을 돌아보면서 ‘아 그랬지!’ 했었다면 대단한 영광이겠다. 혹은 게임을 모르는 분들도 아 게임덕후들이 나름 컴퓨터나 이런저런 게임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즐기기 위해 다방면으로 공부하기도 한다는 측면에서 볼 수 있었다면 더더욱 좋겠다.
산만하지 않게 잘 쓰고 싶었는데, 너무 하고 싶은 게임 이야기가 많아 이 모양이 되었다. 그럼에도 108콤보를 참고 여기까지 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한다. 어쨌든 오늘도 생업, 학업에 종사하면서 재미와 추억과 경험치를 쌓아갈 여러분들에게 아래 짤방을 바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