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지난 9월 웹툰 <뷰티풀 군바리>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가학적 욕망 혹은 쾌감을 군대라는 공간을 이용해 시각화하고 정당화”한다는 비판과 함께, 네티즌들에 의한 연재중단 청원이 있었습니다. 비판의 타당성을 인정하더라도 연재중단 청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잇따랐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박이 있었습니다.
ㅍㅍㅅㅅ에 두 주장을 모두 싣습니다.
1.
첨부한 글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우선, 다음 두 질문을 생각해 보자.
네이버에 연재중단 청원을 하는 것과, 단체로 비방댓글을 달고 평점을 낮게 주는 것이ㅡ “표현에 대한 집단적 압력 행사”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가령 만화의 평점이 갑자기 낮아져 연재 중단이 결정된다면, 그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인가?
창작물의 연재 여부를 결정할 때, 네이버 편집부의 자체적인 결정으로 연재가 불허되었다면 그것 역시 표현의 자유 침해인가? 아니라면, 연재작을 선정할 때 편집부가 고려하지 못한/않은 요소가, 고려되었어야 할 요소라는 것을 소비자가 청원으로써 지적하는 것은 왜 부당한가?
2.
이러한 모순은, 분리되지 않는 두 주체 – 정치적 주체 시민과 경제적 주체 소비자 – 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한다. 모든 시민은 소비자고, 동시에 모든 소비자는 (의도했든 아니든) 시민, 즉 정치적 주체다. 정작 이들로부터 분리해 내야 할 주체(권력)은 따로 있다. 국가권력이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는데 있어, 시민/소비자의 비판과 국가 산하의 심의·검열기관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가에 의해 검열된 표현은 매체의 의사를 떠나 원천적으로 유통될 수 없다. 그러나 시민/소비자의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의 판단 권한은 전적으로 매체에게 있다.
크고 유명한 매체인 네이버에서의 연재 여부가 표현의 자유를 가늠하는 척도도 아니다. 네이버에 실리지 못한 창작물은, 그것의 가치(예술성이든 수익성이든)를 지지하는 매체에서 연재될 일이다. 수요가 없다면 창작자가 독립 매체를 통해 직접 연재할 일이다.
“(시민/소비자의) 집단적인 압력으로 표현물을 매체에서 내리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국가권력(혹은 기타 독점적 권력)에 의해 표현물이 매체에서 내려지는 것’에 비해 대단히 바람직하다. 후자가 매체들(그리고 연재물들)의 성격을 획일화시킨다면, 전자는 매체를 분화시키고 다양화시킨다. 매체가 상충하는 소비자들의 요구들 중 어떤 것들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 매체의 정체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3.
잡지사에 대한 사과 요구나 불매운동, 포탈사이트에 대한 웹툰 연재 중단 청원은 대상 회사에 어떠한 법적 강제력도 갖지 않는다. 이것들 역시 시장에서 소비자가 갖는,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개개인이 갖는 ‘표현’의 연장이란 뜻이다. 형식상의 요구는 사과, 연재 중단, 매체의 폐지일지 모르나, 시장에서 그런 요구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소비자의 불만(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제한되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연재 중단이 아니라) 연령등급 재조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는 판단은 그래서 불필요한 배려이자 자기검열이다. 이것은 불만을 제기하는 소비자의 고려사항이 아니라, 불만을 접수받은 기업이 제시할 수 있는 절충안이다. 소비자들의 상충하는 요구들 사이에서 단/장기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모색하고 취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선택의 (누)적분이 곧 기업의 정체성이 된다.
4.
“우리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취약”하고, 이런 청원이 통용된다면 “약자가 잃을 것이 더 많다?” 나는 권리가 이런 식으로 ‘흥정’될 수 있다는 발상부터 우려스럽지만, 그 흥정의 순진한 계산은 더욱 우려스럽다. 거대자본이나 유통 구조를 소유하지 못하는 시민, 즉 시장 구조 안의 ‘약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는 소비자로서의 목소리다. 그 표현의 권리조차 온전히 챙기지 못하고 검열하면서, 대체 어떤 표현의 자유를 얻어내겠다는 것인가?
“<송곳>과 <26년> 같은 작품에 대해 보수단체가 연재 중단 청원을 할 수 있다”? 왜 그러면 안 되는가? 나는 보수단체든 일베든 마땅히 그럴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수수방관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로부터 작품을 지키고 싶다면 편집부에 (기업에게는 상업적 가치로 환원되는) 작품의 예술적·사회적 가치를 강조하고, 작품을 계속 연재해 달라는 청원을 하라는 뜻이다. 작품을 열심히 보고, 긍정적 피드백(평점, 댓글)을 남기고, 공유하여 홍보하라는 뜻이다.
문화 컨텐츠는 ‘사회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가질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 감동을 주든 재미를 주든, 작가는 ‘팔릴 만한’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고 대중은 사주어야 한다. 좋은 작품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즐기고, 소비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지, “쓰레기 작품의 연재를 비난하지 않았으니, 이 작품의 연재도 보장해 달라”는 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얼치기 흥정을 고민할 시간에, 시민은 자신의 가치 지향을 어떻게 ‘영향력 있는 소비자의 욕망’으로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원문: 한지은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