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딱 봐도 강렬한 포스터다.
포스터 안의 저 잔뜩 구겨진 배우-실제 출연 배우다-의 인상하며, 그걸 콘트라스트 강하게 처리한 흑백 이미지하며, 붉은 산세리프체로 저스티스라고 써 놓은 것 하며… 아, 저게 저스티스가 아니라 데피니션이었으면 얼마나 마음 편했을까.
고백하자면 편집자는 이 연극이 ‘정의란 이런 것이다’ 결론 내리고 관객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 그랬듯이 연출자님을 탈탈 터는 인터뷰를 하려 했는데, 이번 연출자님은 말재간이 없으시다며 다짜고짜 런 도는 것부터 보여주셔서 당황한 상태였다(런 – 실전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공연하는 것). 상상해보라. 듣보잡 편집자 하나를 앉혀놓고 그 한 명을 위해서 전 배우가 코앞에서 열연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도중에 관객 반응을 유도하는 씬에선 배우들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나 혼자였으니까. 공연은 저 포스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화장실을 갔는데 누가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려서 감금되기까지 했다. 그렇다. 난 이 극단에 또 당한 것이다! 부들부들
그럼 다시 한 번 극단 소개를 할까 한다. 이 극단은 세월호 이후 “잊지 않겠습니다”란 다짐을 한 뒤, 그 일환으로 작년 9월 <민중의 적 2014>를 올렸다. 그때 인터뷰를 진행하며 ㅍㅍㅅㅅ와 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번 공연<정의란 무엇인가>는 여전히 잊지 않았다는 두 번째 증명인 셈이다.
극단 ‘C바이러스’
2009년 창단한 극단 ‘C바이러스’는 컴패션 바이러스(Compassion Virus)를 우리 사회에 파고들게 하여, 대중에게 영적, 정신적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도로 창설된 전문 창작 집단이다. 주로 창작 공연과 국내 초연의 외국 문제작들을 생산한다. 약자의 이야기를 하고, 이 시대를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 있는 작명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정의란 무엇일까?
편집자(이하 편) : 이 연극은 처음에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이현정 연출 (이하 이) : 마이클 샌델 책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사람들마다 정의가 없다고 말하거나 모두 다른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각자의 말들을 연극으로 담으면 어떨까? 하고요. 정의라는 것과 가볍게 놀아보고 싶었어요. 어렵기보다는, 재미있는 작업을 하길 원했거든요.
편 :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을 준비하시는 과정이 다른 연극과는 좀 달랐다고 들었는데요?
이 : 예. 1월부터 배우들과 함께 정의에 대해 정기적으로 토론을 했어요. 그런데 거대 담론으로서의 정의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다들 우울해져가고 지쳐갔죠. 그러다 직접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어요. 각자의 어떤 일을 겪었는가 이야기해보고, 유명인들의 말을 모아보고, 자료를 찾으면서, 짧은 장면부터 짜기 시작한 겁니다.
편 : 이 연극은 배우들과 함께 만드신 것이군요?
이 : 그렇습니다. 원작도 없고, 서사 플롯도 없이, 그저 여러 상황들을 모은 거예요. 일상에서 부딪치는 정의를 보여주려는 거였죠. 아홉 명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펼쳐내는 정의의 몽타주인 것이죠.
그 덕분에 이 연극은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각 에피소드들은 의도된 하나의 서사에 끌려가지 않았고, 모두 제각기 살아 펄떡거렸다. 잘 드는 칼로 이 사회를 툭툭 베어내어 시뻘건 단면을 보여준 것만 같은 그런 연극이었다.
편 : 일상에서 부딪치는 정의… 그래서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흡입력이 있나 싶었는데, 지금 저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거든요.
이 : 일방적 악인도 선인도 없고, 허무한 구호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디서든 만났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죠. 이들을 보면서 관객이 ‘스스로의 정의’를 떠올리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편 : 그것이 연출님과 대표님(이문원 교수)이 지향하는 현대극이신 거죠? 이왕 말이 나왔으니, 독자들에게 현대극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문원 교수 :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현대극이란 개념이 나온지 벌써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다보니 더 이상 현대인을 반영하기 힘들어졌죠. 19세기 노르웨이가 지금 대한민국과 얼마나 관계가 있겠어요. 연극이 예술로써 좀 더 이 사회에 밀착하려면, 오늘 날의 현대성을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쉬는 이슈를 다루어야 하죠. 그것이 저희가 지향하는 현대성입니다.
이 : 하나의 긴 드라마도 좋지만, 요새의 현대인들은 호흡이 빨라요. 앱을 켰다 끄고, 채널을 계속 돌리고, SNS로 짧은 글을 나누죠. 타임라인은 쉴새없이 흐르고요. 결과적으로 짧은 에피소드들을 모은 이 연극이, 형식적으로도 현대성을 보여준 셈이 되었습니다.
편 :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보았어요. 시간이 어떻게 이렇게 금방 지나갔는지 모르겠네요. 저처럼 집중력이 짧은 사람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리듬이었다고 봐요. 그렇다고 너무 숨가쁘지도 않고, 감정도 충분히 살려주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아홉가지 정의의 몽타주
그럼 간략한 에피소드들을, 스포일러하지 않는 선에서 소개해볼까 한다. 자세한 건 연극을 통해서 보시길 바란다.
1. 정의란 무엇일까?초등학생 종심이는 학교 숙제로 정의에 대해 검색해본다.
편집자의 감상 : 정의를 정의하고 시작하니, 기준을 갖고 볼 수가 있어서 매우 유용했다. 감사한 오프닝.
2. 주차장 정의 : “누군가가 내 차를 긁고 달아났다. 어렵사리 범인을 찾았는데, 이런 기막힌 상황이 될 줄이야…”
편집자의 감상 : 흥미있는 소재가 여러 개 담겨있다. 분명 누군가는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정식으로는 어떤 해결도 할 수 없는 일들. 피해자는 스스로 구제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신상을 털어도 되는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정의인가? 피해자가 남자였어도 저렇게 일방적으로 억울한 상황에 처해질까? 가해자가 책임지고 보상하는 정도는 어디까지가 적절한가? 물론 연극은 답을 주지 않는다.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최소한 그거라도…” (배우 장선)
3. 김이병의 휴가 : “김이병은 우리 내무반 막내였어. 우리 선임들은 우리가 교육받은 대로 교육했을 뿐이지. 그런데 김이병은 이상해졌어. 아무 일도 없었는데 걔는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거야…”
편집자의 감상 : 군인들의 연기가 너무 리얼하다 못해 잠시나마 선임 역을 하는 배우들이 좀 미워졌음. 이들이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대사와 상황들이 너무나 훌륭하다. 어떻게 이렇게 리얼하고 예리하게 사회를 채취했지? 아마도 배우들이 직접 군대에서 겪은 실화를 재구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간에 ‘뚜이떠’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따로 배우에게 물어보고서야 알았다. ‘트위터’는 아니다. 연극을 직접 보시면서 유추해 보시라.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우린 열심히 한 죄 밖에 없어.” (배우 김정석)
배우가 뽑은 명대사 : “뚜이떠 알아?” (배우 황보정일)
4.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 “난 비정규직 백화점 판매원. 어느 날 고객이 찾아와서 마구 화를 내는 거 있지. 방향제를 아이가 마시고 입원했으니 책임을 지라나?”
편집자의 감상 : 이 에피소드에서 짜증나서(…) 좀 울었다. 정말 우리의 얘기구나 싶었다. 밤고구마를 물 없이 한 입에 삼킨 답답함… 실제로 배우 중 한 분이 백화점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실화라고 한다.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손님이 없는 거랑 매출이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배우 최귀웅)
배우가 뽑은 명대사 : “못 참겠으면 고소해. 아니면 일들 해.” (배우 김지혜)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배우 한아름솔)
5. 토크쇼, 그 사람이 알고 싶다! : “청년 실업 백만 시대.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이백만 명의 청년 니트족. 취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잉여인간이자 우리 사회의 짐, 니트족 한 분을 오늘 만나봅니다.”
편집자의 감상 : 열정 중독 사회인 한국에서 꼭 필요한 담론. 니트족이 뭐가 나빠!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억울하다!” (배우 김경덕)
6. 내 친구 동성이 : “동성이는 초등학교 시절 내 친구였어. 가난하지만 그림을 잘 그렸어. 심지어 내 만화책을 훔쳐가기도 했지만 우린 좋은 친구였지. 그런데 얘가 반장 선거에서 나를 떨어뜨렸어. 그날 이후로 난 정의를 되찾기 위한 복수를 시작했지…”
편집자의 감상 : 내용도 내용이지만, 놀라운 시퀀스 연출이다. 무대 위에서 마치 숨가쁜 모션그래픽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보는 내내 넋을 놓고 봤다. 이런 연출을 힘들이지않고 팍팍 이끌어가는 배우들 간의 호흡도 놀랍다.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직접 가서 보시길 바란다.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올바르게 이기자!” (배우 김민주)
7. 전철에서 만난 무라카미와 달걀 : “무라카미가 말했지. 거대한 벽과 그에 대항하는 달걀이 있다면 자긴 달걀의 편에 서겠다고. 어이, 무라카미, 달걀의 얘기 좀 들어볼텨?”
편집자의 감상 : 무라카미는 무슨 말을 해도 멋있다. 심지어 달걀이 옳지 않을 때라도 달걀의 편을 들겠다고 했다. 그 균형감각에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 연극에서의 달걀은 벽에 부딪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우가 뽑은 명대사 : “영혼이요? 몸이 살아야 영혼이 사는게 아닌가?” (배우 이다일)
8.독수리 오형제
편집자의 감상 : 실제 검사, 의사 등 한국의 엘리트들의 선서를 들려줘서 신선했다. 생각은 많아졌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참는다.
9. 옥탑방 엄마 : ” 우리집 옥탑방에 세들고 있는 아줌마는 임신 중이다. 남편은 집을 나갔다. 집세가 몇 달이나 밀렸다. 엄마는 아빠를 앞세우고 집세를 받으러 올라갔다. 그런데…”
편집자의 감상 : 1번 에피소드와, 7번 에피소드에 나온 상황들이 모인다. 개인적으로 내상을 가장 심하게 입은 에피소드이다. 아직도 임신한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다른 사람들도 꼭 봐주었으면 좋겠다.
10. 63인의 인터뷰 : “정의가 뭐냐고요? 유니콘? 책에서는 많이 봤어요. 하지만 전 본 적이 없어요…”
편집자의 감상 : 실제 63인의 인터뷰를 진행한 뒤 그 편집된 영상이 잠깐 나온다. 지루하지 않고 짤막하다. 정말로 정의를 다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다. 나름 꿀잼이다.
적어도 이웃에 고통에 눈 감지 않는 것이 나의 정의
편 : 정말 잘 보았습니다. 대사도 너무 리얼하고, 그러면서도 함축적이고,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중간에 랩이 섞인 공연도 좋았고요. (배우 황보정일이 직접 랩을 작사하고 불렀다) 영상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도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 같습니다. 에피소드마다 스타일이 달라지는 것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결국 우리의 정의로군요.
이 : 네. 모두가 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데, 세상은 조금도 정의로워지지 않았어요. 그건 정의는 누가 이루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잊지 않고, 일상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변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때, 조금이나마 정의에 다가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정의란 내 주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의 결론은 그렇게 난 것이지요.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최소한 이웃의 고통에 눈감지는 않는 것이 정의가 아닐까, 하고요.
편 : 눈감지 않는 것이 정의라면, 이 연극은 그 기준에서는 굉장히 정의로운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보았으면 영업하는 것이 인지상정. 답답하고 속상하고 멘탈에 부상 입을 것 같은 소재들이지만, 연출의 힘과 배우들의 에너지 덕에 의외로 재미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능란하게 완급조절된 연출이 세련되게 우울감을 희석시켜준다. 다행이다. 편집자는 이런 소재를 정말 보기 힘들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로 런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안절부절했지만, 보고 나니 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연극 <정의란 무엇인가>는 5월 12(화)부터 5월 17일(일)까지, 아쉽게도 딱 일주일만 한다. 공연 정보는 다음과 같다.
공연 일시: 2015. 5. 12(화) – 2015. 5. 17(일)
공연 시간: 평일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일요일 오후 3시 (총 7회)
공연 장소: 노을 소극장 (대학로)
티켓 가격: 일반 25,000원, 대학생 15,000원, 초·중고생 10,000원
공연문의 및 예약: 인터파크, 황다솔 (010-6643-8680,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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