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햇살은 아직 뜨겁다. 극단 ‘C 바이러스’의 지하 연습실에서는 배우들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 더운데 고생일 것 같아 에어컨은 없는지 여쭤보았더니, ‘더우세요?’ 하시며 업소용 선풍기를 편집자의 바로 앞에 정면으로 세팅해주셨다(…) 현장감을 느끼고 싶다면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를 배경으로 깔고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이번 <민중의 적 : 2014>의 극본을 쓴 이문원 연출은 ‘C 바이러스’의 대표이자 한동대학교 언론정보문화학부 교수이다. 편집자가 도착했을 때는 배우들에게 무서운 기세로 연기 주문을 하시는 중이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연출가 모드를 끈 후에는 정다워지셨다.
<민중의 적 : 2014>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의 <민중의 적>을 원작으로, 밀양 송전탑 문제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형의 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입센은 사회 문제를 예리하게 다룬 작가로 유명하다. 원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의사인 스토크만 박사는 마을을 살리기 위해 히스틴 온천 개발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온천물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밝히려하지만, 온천에 이권이 개입된 주민들은 진실을 밝히는 것을 방해하며, 스토크만 박사를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는다.
바로 감이 오겠지만 요약만으로도 답답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교육은 강의실 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편집자(이하 편) : 이번에 올리시는 <민중의 적 : 2014>는 사회극이죠?
이 : 그렇습니다.
편: 사회극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 : 저는 원래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유학시절 오스카 브로켓 교수로부터 연극사를 배웠는데, 이 덕분에 시대적 맥락에서 연극을 보는 눈을 길렀죠. 연극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고, 시대를 반영해온 예술이거든요. 그리고 또 교회사도 배우게 되었는데 성경 안에 머무르지 않는, 역사 속의 성경을 알게 됐죠. 그것을 통해 인간과, 시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내가 속한 사회와의 접점을 깨달았습니다.
편 : 하지만 그런 지적인 깨달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이 : 사실 저는 개인주의적인 인간입니다. 집단과 개인을 택하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개인의 행복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오래 전에 개인적인 어려움을 크게 겪은 적이 있어요. 누군가가 나를 치명적인 내용으로 모함했는데, 그게 누군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저는 한 동안 아무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모두를 불신하며 움츠러들어 살았어요.
편 : 힘드셨겠군요.
이 : 그렇죠. 그러다보니 타인의 어려움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어려운 이가 있으면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했죠. 현실 참여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것부터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내가 있는 곳의, 작은 사건부터 관심을 가진 거죠. 하다 보니 점점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고요.
교수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의 어려움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니, 교육자로서 어떤 각성이 왔어요. 교육은 강의실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자라면 강의실 밖에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 것이죠. 밀양 송전탑을 반대하고 있는 할매들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할매들은 송전탑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더 크고, 더 먼 미래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죠.
이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
편 : 그러고 보니 예술 감독은 단국대 이현정 교수님이시던데, 약력을 찾아보니 상당히 많은 작품을 같이 하셨더라고요.
이 : 당연하죠. 부부니까.
편 : 헉… 부부끼리 일을 함께 하시는군요. 멋집니다. 두 분 다 교수이신데,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 아닌가요? 질문이 무척 속물스럽긴 한데, 돈 안 되는 사회극 같은 걸 한다고 두 분이서 마찰이 있거나 하진 않나요?
이 : 전혀요. 작품 해석 때문에 싸우는 일은 많아도, 그런 걸로 싸우진 않아요. 우리 부부는 생각이 비슷해요. 합의가 있죠. 게다가 자녀가 없어서 양육에 돈을 쓸 일도 없어요. 거기서 절약되는 돈으로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거죠.
편 : 나의 아이 대신, 우리들의 아이를 기르신다는 의미인가요?
이 : 그렇게까지 말하면 좀 거창해요. 상대적 부를 나눠야 한다는 개념은 있지만, 딱히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 결 같은 투사가 될 수 없어요. 예술가로서 작품성이라던가, 명예욕이라던가, 개인의 안위를 보존한다거나 하는 욕망들이 저에게도 당연히 휘몰아치고 있죠. 제 모습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어요. 다만, 내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이에요.
왜냐하면 나에게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 왜냐하면 나에게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문원 연출은, 자기 주변의 작은 것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뿐이라고 말했다. 사회 참여라고 하면, 보통 거창한 이론과 거창한 대의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나한테도 불공평한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의 시대를 기록하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
편 : <민중의 적 : 2014>은 밀양 송전탑 얘기라고 알고 있는데, 이 문제는 꽤 오래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거죠? 2008년 첫 궐기 대회에서부터 6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계기는 뭘까요?
이 : 역시 세월호 사건이죠. 한국은 2014년 4월 16일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고 나니, 사회적 이슈들이 더욱 내 일처럼 다가왔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거예요. “여기서 침묵하면, 그 다음엔 나다.” 그런 느낌이 든 거죠. 우리가 왜 사는가, 시대가 어떤 시대여야 하는가, 하는 그런 고민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 나보다 더 큰 문제를 대면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시민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침묵하면, 그 다음엔 나다.
편 : 세월호 사건에서 위기감을 느꼈고, 그래서 더 이상 가만있지 않고 스스로의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기로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말씀하신 사회적 책무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 극단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어요. ‘C 바이러스’의 ‘C’는 compassion의 C입니다. 일단은 긍휼이란 뜻이지만, 어원으로 따지면 고통(passion)을 모은다(com)는 의미에요. 즉 타인의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이죠. 약자와 함께하는 정신이 퍼져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편 :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사회적 책무다?
이 : 그렇습니다. 나아가 제목에 <민중의 적 : 2014>라고 연도를 표기한 이유는, 이 연도를 이어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예술은 그 시대를 기민하게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리얼리즘의 예술이죠. 현재 드라마 문법에서 리얼리즘은 주류 문법이에요. 하지만 원래 리얼리즘 정신은, 신화나 다루던 귀족 사회에서 약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시작됐어요. 그 시간, 그 시대, 사회를 투영하려는 혁명적 시도였던 거죠. 약자는 가만히 있어야 했던, 민중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침묵에 대항하여 진실을 외친 정신입니다.
리얼리즘이란 시대의 침묵에 대항하여 진실을 외친 정신
편 : 종합하자면, 약자의 편에 서서, 예술로 시대의 기록을 쓴다, 그것이 지식인로서, 또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무가 되는 거군요.
이 : 그렇습니다. 여기 배우들도 마찬가지에요. 스스로 결정해서 모인 배우들이거든요. 시민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저는 이 친구들이 ‘예술가의 책무’에 공감했기 때문에 모였다고 생각해요. 시대와 타인과 이웃에 대한 책임이요. 말했듯이 예술이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그저 이 순간, 자신이 각자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그러다가 더 먼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요. 그게 저는 민중이라고 생각합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