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사건. 여기에는 고민할 층위가 여럿 존재하지만, capcold의 경우는 관심사 특성상 청와대가 대충 묻어버리려고 하는 보도지침 부분에 주로 주목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모글루스를 뜨겁게 불태운 계약서 공개 떡밥 같은 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몰래 단서들을 공급해줄망정 그다지 직접 물 생각이 없었다(재개발 계획을 인지한 것과 철거 일정을 안다는 것은 좀 많이 다른 만큼, 크게 중요한 새 단서라고 보지 않아서).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표면화된 ‘약자는 정의다‘ 착시를 둘러싼 논쟁들, 그 와중에서 왜 철거민들은 전철연을 끼웠나, 혹은 좀 더 거칠게 까는 쪽에서는 왜 그 정도 보상금 탐욕으로 자신과 남의 목숨을 걸었냐 같은 부류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좀 관심이 간다. 바로 선택의 극단화라는 기제를 이해하기 위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에 관한 몇 가지 생각거리.
실제 세계 속의 ‘비합리성’
사회현상을 이해해보려는 정석적인 접근이라면 기본적인 이론 모델을 깔고, 현실세계와 연동시키기 위한 중요한 빠진 요소들을 메꾸고, 그 뒤 비로소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것. 선택의 극단화에 대한 기본 모델로 사용하기 좋은 것은 역시 치킨게임 이론으로, 타협을 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가 파멸하는데도 서로 비타협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쪽의 양보를 유도하는 식이다. 다만 모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그 안에서 사람들이 제한적 지식 내에서라도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논리를 가정한다. 그렇기에 이것을 실제 세계와 연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은… 바로 비합리성의 요소들이다.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우선 가장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법한 두어가지를 예로 들어 생각을 뻗어 나가게 해본다면, 바로 ‘설마‘와 ‘울분‘이다. 좀 더 본격적으로 파고 싶으신 분들은 ‘방어적 확신’, ‘감정적 동인’ 정도의 용어로 들어주시면 되겠다. 주: 기본적으로 발상 노트인지라, 무슨 확고한 이론적 설명으로 믿지는 말아주시길. 아니 내용 자체가 그런 확고한 것이 아닌 요소들을 캐보는 것이지만.
첫 번째, ‘설마’
첫 번째는 설마. 설마 잘못되어도 거기까지는 가지 않겠지, 라는 사고방식 말이다. 이것은 상황 자체의 에스칼레이션과 결합할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치킨 게임이라는 개념을 보급한 냉전의 미/소 군비경쟁의 경우, 사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멸망이라는 끝을 뻔히 전망할 수 있다. 혹은 치킨게임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의 경우도 정면충돌로 둘 다 죽어버린다는 마무리를 미리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많은 일상생활에서의 치킨게임이라면, 극단화된 상한선을 미리 가정하지 않곤 한다. 설마 잘못돼도 -5겠지, 라고 예상치를 두고 시작하지만, 서로 경쟁을 한 번씩 주고 받으면서 상황은 악화되고 에이, 그래도 잘못되면 -10이겠지, 한 바퀴 더 돌면 아아 -20까지도 각오해야겠구나 하다가 어느덧 -100까지 걸려있는 판이 되어버린다.
판에 걸린 리스크가 커지면서 사소한 균열로 사고가 발생할 여지도 같이 커진다. 예상된 결과를 놓고 긴장이 에스칼레이션되는 정도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주관적 예상치를 바탕으로 공방을 하는 와중에 결과 자체가 에스칼레이션되는 것 말이다. 이 과정에서는, 투여한 지분이 생각나서 도저히 중간에 빠질 수 없는 절실함과 불안함까지 생성된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불안감이 증가하기만 하는 것이라면 적당히 공식에 같이 넣어버리고 땡 하면 되겠지. 오묘하게도, 결과 자체의 위험성이 계속 에스칼레이션을 하는 와중에도 심리적 예상치 ‘설마’는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 “보기에는 자칫하면 파국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별것 아니고 이제 곧 해결될 거야”, “다들 무너지더라도 나에게만은 묘수가 있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런 ‘설마’는 의혹이 아니라 방어적 확신이다. 확신은 일정 정도 이상 진행되면, 주어진 반증자료마저 가볍게 씹어버리고 자가성장을 하는 무서운 놈이다. 즉 상황 자체의 리스크가 증가해서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방어적 확신으로 틀어막고 있다 보면 괴리는 커지고 어느덧 파국은 문 앞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대단한 개념 같지만, 커플 간의 싸움을 해본 적이 있는 분들은 쉽게 이해하실 것이다 – 시작은 사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갈라서기 직전까지 몰리는 것 순식간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비합리적, 극단적 판단을 내려서 상황이 틀어지면, 불안감과 방어적 확신은 더 커지고 더욱 극단화되기 쉽다.
두 번째, ‘울분’
두 번째는 울분. 행보를 더욱 극단화시키고, 합리적 판단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준의 행보까지 가능하게 하는 동기 요인이라면 바로 격한 감정이다. 돈이나 주거권 같은 나름대로 계산이 가능한 합리성의 영역 이외의 포괄적 가치관에 따른 움직임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축적된 울분에 의한 오기라는 변인이 개입할 때 골치 아파진다. 상식적으로, 돈 문제만으로 보면 결국 쟁의에 투자하는 비용이 보상 예상지분을 초과할 때 투쟁을 접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어느 틈에 애초의 이해관계마저 넘어선 ‘지사‘들이 되어있다.
과연 칠순 노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망루에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1) 그만큼 절실한 약자 생존의 문제다 vs 2) 돈 욕심에는 그만큼 끝이 없다 정도의 선택지로는 턱도 없다. 3) 정말 크게 분노해버렸다, 쪽이 해답에 더 가까울 수 있다(물론 그렇다고 1,2가 일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며느리 앞에서 용역에게 두들겨 맞았다” 같은 정황을 참조하자면 말이다 (클릭). 그런 일을 당하면 보상금액은 구실이 되고 주거권/영업권조차 그냥 허울 좋은 명분이며 실제로는 그놈들에게 당한 존엄의 회복이라는 단순하고 추상적 가치가 핵심 동기의 자리를 꿰어찰 수 있다. 심지어 본인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든 말든 말이다.
또는 용산구청 플래카드 사건을 기억해보자. 처음에는 돈 문제이기 때문에 구청에 가서 해결해 달라고 항의를 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격화되어 정말로 다른 업무에 방해가 되는 수준의 진상까지 펼쳐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청이 공식적으로(!) 생떼거리로 규정하는 순간, 속된 말로 ‘빡’돈다. 구청, 즉 행정기관도 물리쳐야 할 적이 되어, 더욱 전투적 자세는 격화된다. 온 주변에 적이 늘어나면, 분노는 축적되고 선택은 극단화된다.
비합리성, 그리고 극단적 선택
이런 요소들은, 크고 작은 선택의 문제에서 극단화를 이끄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산 철거민들에게 전철연이 유일한 선택이었는가 문제. “전철연만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라는 투의 발언이 왜 나올 수 있을까. 우선, 철거민 이해를 반영하는 전철협과 전철연 두 단체를 한번 보자. 한쪽은 제도화를 추진하고자 캠페인을 하고 법적 협상을 기치로 거는 동네고, 다른 쪽은 뜨거운 연대와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자는 동네다. 전철협의 접근법은 변호사 위주로 용산 철거민 대책을 진행한, 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 정책과 상통한다. 반면 전철연은 강경 노선과 민중연대 정신으로 민주노총의 강성 라인과 통한다.
스스로 철거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서 ‘전문적으로 이런 사안을 도와주는’ 동네를 결합하고자 하는데 이런 선택지가 있다고 해보자. 재개발 계획이 막 공지되고 철거 스케쥴은 잡히지 않은 즈음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리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럴 때 각종 ‘설마’ 속에서 리스크 예상치가 왜곡되면, 일찌감치 조직화하고 제도적 협상을 하기보다는 각자 알아서 이익을 보고 살 길을 찾는 쪽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아예 후다닥 스케쥴이 잡히고, 용역깡패들에게 가족 앞에서 두들겨 맞은 후라면 어떨까. 쌓인 울분 위에, 당장 법보다 주먹으로 다가오는 상대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법보다 가까운 주먹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내리기 쉬워진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돌아다니는 변호사보다는 옆에서 같이 주먹질해주는 이들이 더 감정적으로 고맙고. 결국 야금야금 높아져 가는 리스크 속에서, 결국 애당초의 보상금 문제를 뛰어넘는 비용을 투자한다. 여기서 비용이란 투쟁기금으로 각출했다는 1천만 원 이야기가 아니다. 목숨 말이다.
혹은 그 전에, 왜 어떤 집안은 재개발을 할 것이라고 결정이 난 후에도 재계약하고 몇억 꼴아박으며 무려 팬시한 호프점으로 업종전환까지 했느냐는 질문도 그렇다. 쉬운 추론인 ‘알박기’라면 그 타이밍으로 그런 고비용 재공사를 할 이유도 없고 무려 체인점 가맹목표라는 방식까지 취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실제 철거까지 가는 스케쥴을 생각하고 그때까지 투자금을 뽑을 수 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여기에 관한 지금껏 나온 중에 가장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는 이곳을 참조). 설마 철거하기 전까지 장사해서 본전 못 뽑겠어, 설마 철거 스케쥴을 크게 앞당기겠어, 내가 지금껏 동네에서 장사한 가닥이 있는데 쉽게 무너지겠어… 물론 현실의 위험성은 그런 와중에도 점점 진행되어 또 한쪽으로는 불안감에 스트레스가 커지고. ‘설마’라는 믿음은 약간만 불이 붙으면 근거를 초월한다. 아니, 아예 자신의 확신에 유리한 근거만 들린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철거결정이 떨어지면 사태는 파국 루트를 탄다. 마찰은 일어나고,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울분은 축적되어 더욱 상황의 전개는 예측불허의 비합리성이 커진다.
비슷한 문제는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철연 같은 조직화된 운동 방식에서도 말이다. “설마 우리가 거기까지 당하겠어”, 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다가 매번 예상한 상황 이상의 상황에 말려들다 보면, 조직 운영은 주먹구구가 된다. 나아가 운동의 원동력이 철거민으로서 불의를 당했다는 자각에서 나오는 “울분”이라면, 동지들은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 정도는 당연히 공감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지사정신‘이 발동되어 부실을 커버하게 된다. 특히 주먹구구와 지사정신이 결합하면 돈 관리는 불투명해지고 운 나쁘면 개념 없이 공적 주머니와 사적 주머니가 섞이며, 갖은 구멍이 나는데도 가족적 인간관계 운운하며 뒤덮어서 적당히 굴러간다.
“소설 쓰고 있네”라고 보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사파 NL들의 학생운동 현장에서만 해도 숱하게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의도적인 악의 조직이나 사기꾼 집단이라서가 아니다(검찰이 달라붙었어도 이번 용산 건에서 각출한 돈이 전철연 운용자금으로 흘러 들어간 흔적을 못 찾았다며). 정말 정의를 위해 한 몸 바친다고 굳게들 믿고 움직이지만, 점점 극단화 및 총체적이 되어 분야 운동체이라기보다 빠져나올 수 없는 종교체에 가까워지는 것이 문제다. 과잉 단순화에 파국화시킨 이야기지만, ‘설마’와 ‘울분’은 그 정도로 강력하다.
‘설마’와 ‘울분’을 넘어서
그렇다면 설마와 울분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나마 정공법이라면 애초부터 최대한 넓은 가능성을 타진하고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조율하도록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협상 테이블을 꾸리는 것이다. 치킨게임이든 수인의 딜레마든 결국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중간에서 소통하고 협상하는 것이니 말이다. 감정적 대결을 유도하는 초월적 수단들(예를 들어, 용역깡패나 대민피해병기)을 취할 경우 곧바로 협상 자체에 불리한 조건으로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깡패 동원 적발 시 보상금 3배 크리라든지. 하지만 그 이전에, 모든 행정을 투명하게 해서 잘못된 심리적 예상치 자체를 줄이는 것도 있겠다. 혹은 다른 좀 더 전문적 관심사가 있으신 분이 생각해내실 방법들도 있을 테고.
비합리성의 요소들을 염두에 둬야 좀 더 실제 설명력이 붙는다는 말은, “이성만 가질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공감 좀 하라능”하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현상의 작동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변인의 이야기이고, 정책 같은 실제 해결책을 만들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의 이야기다. 지금은 당장 ‘설마’와 ‘울분’ 정도를 끌고 왔지만, 그 외에도 당사자들에게 작용했을 주변과의 심리적 경쟁이라든지(이런 것은 하필이면 많은 경우 ‘소문‘이라는 비공식적 소통 루트를 통해 키워진다)하는 변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상적인 방법은 이런 요소들마저도 전부 법과 제도로 소화하는 것이다. 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동안은(아마 주욱)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케이스별로 융통성 있게 중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한 행정인 것이다. 대통령 먹었으니 운하 파겠삼, 서울시장 되었으니 디자인서울 하겠삼, 용산구청장 되었으니 임기 내에 후딱 뉴타운 만들어치우겠삼 하는 소박한(…) 꿈만 이루는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의 뇌력도 심심할 때마다 엉뚱한 대결구도나 만드느라 소모하기보다는, 사태의 다양한 측면들을 캐내서 여러 합리적/비합리적 요소들에 대한 입체적 해석과 대처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각자 오바하지 말고 잘하는 분야에 주안점을 두면서.
…뭐, 그냥 그렇다고.
PS. 사실 이것은 쿨게이들은 감성 없는 위선적 반쪽 이성이니 어쩌니 하는 시끄러운 논란에 대한 capcold식 대답이기도 하다. 늘 그렇듯, 별로 대답 같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