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은 우리의 이야기다에서 이어집니다. (피처 이미지 출처: 민중의 소리)
다수이거나 소수여서 옳은 게 아니다. 옳은 것이 옳다.
편 : 주인 의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 그것이 민중이란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들을 죽 들어보니, 교수님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약자의 편에 서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민감하겠지만, 이 연극의 내용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원작에서 스토크만 박사는 엘리트 지식인이에요. 그리고 다수의 민중을 ‘옳지 않다’고 말하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엘리트가 어리석은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이 : 민감한 부분이죠. 원작엔 이런 대사가 있어요. “다수는 항상 옳지 않다.” 스토크만 박사는 ‘다수의 민중이 항상 옳다는 허위와 싸우는 혁명가가 되겠다’고도 말합니다.
편 : 심지어 원작에서는 ‘다수의 민중 VS 진실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 구도를 취하고 있죠. 이 구도 그대로 밀양 송전탑 문제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 캐릭터의 균형이 필요했어요. 왜냐면 원작에서 말한 ‘민중’에도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민중은 끔찍한 악몽이기도 하고, 동시에 꿈과 소망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진실을 추구하는 민중과, 탐욕에 사로잡힌 민중, 둘 다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편 : 스토크만 박사, 아니, 이 작품에서의 ‘성도일’이란 엘리트도 결국 민중이란 뜻인가요?
이 : 네. 원작의 스토크만 박사는 강한 인물이에요. 민중의 편에 서주면서 영웅심리로 도취되기도 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 꺾지 않고 진실을 주장하는 인물이죠. 그런데 저는 성도일을 찌질한 인물로 그렸어요. 형에 대한 질투와 자괴감, 다수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진실을 추구하게 되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린 거죠. 성도일을 민중의 원형으로 삼은 겁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민중인 거예요. 다수라고 그저 민중이 되는 건 아닙니다. 민중은 개인에서 시작하죠.
편 : 민중은 개인에서 시작한다?
이 : 네. 성도일의 대사 중에, ‘개인으로서 시작하는 민중’을 하나하나 지목하는 대사가 있어요. 이 이름들은 밀양 주민들의 이름을 가져왔지요. 고 심재철 할아버지의 손자 심병일이는 어딨습니까? 내 어머니, 아내, 우리 가족은 어딨습니까? 김수암 할머니, 이차순 할머니, 박봉덕 할아버지, 한옥순 할머니는 어디계십니까? 보상금 한 푼 안 받겠다며 고향산천을 지키겠다던 그분들은 다 어디 계신 겁니까?
편 : 다수VS소수 구도라던가, 민중VS엘리트 구도 자체를 버리셨군요. 민중으로서의 개인들이 각성하고, 이들이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진 민중과 대립하는 구도가 된 거군요.
이 : 네, 다수는 어리석고, 소수 엘리트가 옳다, 라고 해석될 법한 부분을 희석하려고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사실 밀양에서는 송전탑을 반대하며 남은 주민이 10%도 안 돼요. 이들은 엘리트도 아니고 그저 소수의 약자죠. 하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어요. 이들도 민중입니다. 나머지 주민들은 보상금 받고 타협했어요. 심지어 주민 대표로 여러 가구의 보상금을 챙겨서 도망간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은 입센이 비판한 욕망에 삼켜진 민중이겠죠.
편 : 하지만 입센처럼 편리하게 사람들을 유형화시킬 수는 없는 거군요.
이 :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민중이 다수여서 옳거나, 소수여서 옳은 게 아니에요. 옳은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약자일 때는 누군가가 편이 되어줘야 해요.
진실은 누군가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다
편 : ‘옳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원작에서의 진실은,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진실이었어요. 과학이 똑 부러지게 알려주었죠. 그런데 실제 세상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잖아요? 진실 자체를 가리는 것부터가 난항이죠. 과학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럴 때, 누가 진실을 가졌다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잘못하면 그야말로 그저 약자니까, 소수의 민중이니까 편을 들어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이 : 맞습니다. 진실은 양날의 검입니다. 서로가 진실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진실은 신념의 문제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자파에 대한 무해설과 유해설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지금으로선 기계적으로 두 개를 저울질하는 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반대편 역시 신념이기 때문이죠. 그들에게도 논리, 동기, 희생, 헌신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하고 최대한의 접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편 : 이 연극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진실을 찾고, 어떤 접점을 만드나요?
이 : 성도일은 학자이자 민중으로서 고민하다 최종적으로는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는 신념에 복무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일의 진실이죠. 전자파가 인간에 해악을 미친다는 과학적 증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자파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니거든요. 왜 의문을 제기하는 주민에게 증거를 가져오라고 합니까? 안전하다고 설득하고 있는 국가가 보여줘야지요.
제 생각에, 밀양에서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성도일의 대사이기도 한데요. “내가 살아보고 확인할 거야. 그때까지, 당신들은 옳지 않아.”
편 : 신념에 복무해서 약자의 편을 들었는데, 만에 하나 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겁나지 않나요?
이 :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 움직이겠다는 것은 비겁합니다. 진실은 완전무결하게 독립된 것이라 함께 찾아가는 노력과 합의의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틀리면 반성하고 사과하고 고치면 돼요. 이런 대사도 있어요. “왜 네 진실만 진실이고 내 진실은 진실이 아닌 건데? 그리고, 진실이 왜 대체 하나여야 하는 건데? 여러 개면 안 돼?” 그래서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신념에 배반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요.
편 : 사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권력장에서 휘어지는 것 같습니다. 진실은 빨리 판결되기 힘들고, 몸을 던져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거군요.
이 : 그래서 성도일은 도망가지 않고 거기서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살아봐야 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3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