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원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월급을 받고 계획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몇 개월 치 퇴직금이 나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축은 바닥을 드러냈고, 생활비는 점점 빡빡해졌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돌리고, 가급적 절약하며 살려고 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은행 잔고가 줄어드는 걸 보며 불안이 커졌다. 결국 실업급여와 기초생활수급 같은 복지제도를 알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이렇게라도 지원해 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점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데?” ”
“이건 내가 받을 권리가 있는 거잖아.”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대체 뭐지?”
조금씩, 사고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진상’의 사고구조
일부의 ‘가난한 진상’은 왜 진상처럼 행동하게 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은 자신이 받는 복지나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면 ‘사소한’ 행정 절차나 규정 같은 건 부차적인 것이다. 아무리 규정을 근거로 들며 이 이상 해줄 수 없다고 설득해 봐야 가난한 진상들에게 그런 말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규정 자체도 문제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왜? 규정은 나를 일부러 안 도와주려고 누군가와 누군가가 짜고 치는 음모니까.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가로막는 적처럼 느껴지니까.
가난한 진상은 무례한 사람들일까? 겉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다. 어쨌든 요구가 먹히지 않으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사회복지 계통에서 일하고 계신 많은 분들이 피로와 고통을 호소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하지만 ‘무례하다 – 개입/처벌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경로로 빠져서는 우리는 ‘가난한 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가난한 진상은 단순한 무례함, ‘못 배워먹어서’라기보다는 심리적 방어 기제와 사고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가난을 자신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적·구조적 실패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직 희망이 꺼지지 않았던 시절, 실패와 가난은 ‘내 탓’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나만 더 잘하면, 나만 더 정신 차리면 가난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어떨까? 더 이상의 내 탓은 고통스럽다. 내 탓만 반복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 탈출에 대한 희망이 점차 꺼져가는 바로 그 시점, ‘가난한 진상’에 대한 유혹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 꼭 나만 잘못한 거야?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 복지의 손길에도 감사보다는 당연하다는 태도가 먼저 형성된다. 지원을 받으며 ‘최소한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고 생각하고, 나아가 ‘내가 받은 피해에 비하면 이 정도 지원은 너무 적다’는 불만이 생긴다. 사고방식이 이런 식으로 자리 잡으면, 복지를 받을수록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되고, 지원이 끊기거나 기대만큼 주어지지 않을 경우 강한 반감을 느끼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책임은 점점 흐려지고, 모든 원인이 사회나 국가에 있다고 믿는 태도가 굳어진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이런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복지 정책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더 큰 분노가 형성된다. 결국 복지를 받는 것이 일종의 ‘당연한 권리’가 되고, 이 권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불안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놓는가?
이제 원점으로 돌아갈 차례이다. 결국 가난한 진상을 만드는 건 ‘가난’이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가난, 그중에서도 장기화한 가난은 곧 ‘트라우마’다. 극적인 계기를 맞아 가난이 해결된다 해도, 가난이 남긴 상처는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가난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즉, 경제적 불안은 대인관계·도덕적 판단·의사결정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1) 생존 모드의 발동
첫째, 가난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보다 단기적인 생존에 집중하게 된다. 이를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라고 한다. ‘당장 오늘, 내일 어떻게 살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렵고, 결과적으로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당장 월세가 밀려 퇴거 위기에 처한 사람이 ’10년 뒤를 위한 재테크’를 고민할 여유가 있을까? 그보다는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고금리 대출을 받거나, 일회성 수입이라도 당장 생기는 일을 찾아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점점 더 장기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미래를 준비할 만한 여유가 없으니 ‘지금’을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한 달 후의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인데, 이렇게 생존 모드가 활성화되면 절약보다는 즉각적인 소비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돈이 들어오면 곧바로 사용해 버리는 패턴이 굳어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단순한 나태함이 아니라, 장기적인 보상을 고려할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뇌가 단기적인 보상에 더욱 민감해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자기 개념의 붕괴, 그리고 대물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고, 가난한 사람들이 행동적으로 보여주는 ‘꾀죄죄하고, 구차하고, 유치하고, 한심한 모습’에 반발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만든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한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이다’ 등의 편리한 공식을 만들어 싸잡아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끔 뉴스를 보면 ‘가난한 진상’이 등장한다. 그들이 사회복지사에게, 봉사자에게, 공무원들에게 어떤 ‘진상 짓’을 하는지를 본다. 가난한 진상의 소식들은 고정관념·편견을 재생산, 강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항변한다. ‘진정한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빈곤 포르노’는 실상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나름 일리 있는 설명이다. 사실 가난이 길어지면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처음에는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반복적인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이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노력의 부족’으로 해석하지만, 가난이 장기화되면 개인의 효능감(self-efficacy) 자체가 무너진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동기를 잃어버린다. 가난이 사회적 낙인과 결합하면, 개인은 자신을 더욱 낮게 평가하게 된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다’,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자기개념(self-concept)의 왜곡이 일어나고, 결국 이는 사회적 관계 회피와 경제적 재기 의지의 약화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가난의 대물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면, 가난은 단순한 재정적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심화된다. 유년기부터 경제적 불안이 일상화된 사람들은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합리적인 재정 관리를 배우지 못한 채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 가난이 지속되는 한 이를 극복할 동력조차 상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며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상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종종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여기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무기력과 사회적 낙인은 단순한 의지로 극복하기 어렵다.
사회는 가난을 방치할 수도 있고, 그것이 개인의 몫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의 대물림을 방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가난이 세대를 넘어서며 굳어질 때,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의 가능성까지 함께 소멸시키는 선택을 하는 셈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가난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한 번 가난해졌다고 해서, 그가 그리고 그의 아이들이 영원히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면 우리는 과연 공정한 사회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작가의 말
심리학적 글쓰기, 직장심리, 자존감, 목표관리, 마음건강, 메타인지, 외로움 극복, 공간활용의 심리학 등 다양한 주제로 강연 가능합니다. 출강 제안도 환영합니다.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에서 제 소개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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