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려웠던 과제보다, 쉽게 느껴졌던 과제에 대해 더 긍정적인 학습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가리켜 ‘ELER’ 편향이라고 한다. 참고로 ELER은 ‘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의 약어이다.
왜 이게 편향일까? 언뜻 생각하면 당연해 보인다.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보자. 첫 서론 부분은 쉽다. 그래서 진도가 팍팍 나간다. 내용이 다 이해되니까, 다 ‘배운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본론으로 넘어가니 내용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암기는 고사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해≠학습’이라는 점이다. 사실 학령기를 거친 여러분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책에 있는 내용을 그냥 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자칫 눈에 익숙한 나머지 ‘내가 이걸 다 외웠다, 마스터했다’ 착각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강조되는 것이 외운 내용을 회상하거나 시연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배웠으면 빈 종이에 토해내면서 내가 정말 완벽하게 숙지한 게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혹은 직접 써먹어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따라야 한다.
ELER 편향을 범하기 더 쉬운 사람들
지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아마 그 사이 어딘가쯤 진리가 숨어 있겠지만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지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지능의 불변성에 좀 더 무게를 둔다. 지능이란 타고나는 부분이 강하며, 개인이 어찌하기 어렵다는 암묵적 생각이다. 다른 누군가는 지능의 가변성을 택한다. 후천적인 노력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심리학에서는 전자를 불변론자(entity theorist), 후자를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좀 더 가까운가?
- 불변론자(entity theorist) = 지능은 불변
-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 = 지능은 가변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불변론자들이 가변론자보다 ELER 편향, 즉 쉬운 과제가 더 잘 기억되는 것 같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반면 가변론자들은 어려운 과제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high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judgments of learning)이 더 높다. 가변론자들은 정반대다. 쉬운 과제보다 어려운 과제(low fluency)에 대해 학습판단이 더 높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비밀은 지능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노력의 가치’ 차이에 있다.
불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어차피 지능이야 정해진 거고 타고난 건데, 노력해 봐야 뭘 어쩌냐는 생각이다. 물론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처음보다 더 나은 수행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능의 총량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변론자들은 노력을 덜 하는 경향이 있다. 쉬운 과제는 덥썩 물지만, 어려운 과제는 쉽게 포기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 번이라도 해본 ‘쉬운 과제’는 더 잘 기억하는 반면, 어려운 과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가변론자들은 노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갈고닦느냐에 따라 더욱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은 설사 어려운 과제라 하더라도 노력한다. 쉬운 과제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나를 좀 더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어려운 과제에 더 치열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이들은, 쉬운 과제보다는 어려운 과제를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어려운 과제에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한다
불변론자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나은 성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려운 영단어도 더 잘 기억하고, 시험 점수도 더 좋다. 회사에서는 더 나은 성과와 보상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제 여러분도 그 이유를 짐작할 것 같다. 불변론자들보다 가변론자들이 더 어려운 일에 매달린다. 물론 어려울수록 실패 확률도 생기지만, 적어도 개고생하면서 얻은 경험치는 남는다. 그렇게 가변론자들은 성장하면서 점점 더 어렵지만 더 보상이 높은 일에 익숙해져 간다.
반면 불변론자들은 쉬운 과제에만 머문다. 그래서 쉬운 과제에 걸맞은 작은 보상을 주로 받는다. 물론 불변론자들 중에서도 야심가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부자가 되겠다, 성공하겠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명예를 얻고 싶다, 야심을 불태운다. 하지만 노력으로 이뤄내기에는 자신의 작은 그릇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서 가변론자보다, 불변론자들이 더 치팅의 유혹에 취약하다. 가변론자들은 될 때까지 한다. 그러나 불변론자들은 해도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보상과 명예는 얻고 싶기에 ‘된 척’을 한다. 자신의 성과를 부풀리고 포장한다. 안 되겠으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방해해서라도 상대적 우위를 만들고자 노력하게 된다.
마치며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ELER 편향(easily learned = easily remembered)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 쉬운 것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이겠지만 어려운 것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린 믿음이다. 원래 더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도 오래 남는 법이다. 공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암기를 더 잘하고 싶다면 좀 더 고생할 생각을 하자.
그전에, 기왕이면 불변론자보다는 가변론자가 되자. 지능의 한계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믿음의 차이는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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