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일기를 쓰고 계신가요?
오늘은 일기에 대한 생각들을 꺼내보고자 한다. 솔직히 일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외상성 기억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여름 방학 동안 매일 ‘환경일기’를 쓰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어디 기억도 안나는 기관에서 협찬한 전용 일기장도 받았다.
자고로 일기는 밀려야 제맛(?) 아닐까? 나는 꾸준히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다.
아니, 매일 양치질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무슨 일기냐고! 맨날 학교 갔다 오고, 숙제하고, 밥 먹고, 놀다, 자는 것만 하는 데 쓸 게 없잖아!
그래서 일기를 미뤘다. 검사한다고 하면 몰아서 썼고, 불시에 검사라도 당하면 안 썼다고 앞에 나와서 맞기나 했다.
그런 내게 더 과중한 임무가 주어졌으니 그게 바로 환경일기였다. 그냥 일기 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매일매일, 그것도 환경보호에 관한 주제로 일기를 써야 한다니.
막막함을 느낀 나는 숙제를 미뤄버렸고, 개학 삼일 전이 되어서야 (아마) 생애 최초로 야근을 하며 눈물 나게 수십 일 치의 일기를 메꿔야 했다(아니, 왜 초등학생 일기장에서는 맨날 오늘의 날씨를 적으라고 시키는 건지. 이제 와서 지난 날씨를 기억할 리도 없잖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일기 쓰기가 의무가 아니게 되었을 때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둬 버렸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일기란 걸 다시 쓰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 10년 후, 나는 다시 일기장을 잡게 되었다. ‘병영일기’라는 놈이었다.
병영일기는 군대에 가면 나누어주는 군생활 일기장을 말한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병영일기가 의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 받아 들 때만 해도 저 험상궂게 생긴 조교님들이 일기장 검사라도 하시나, 싶었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열심히 병영일기를 쓰고 있었다.
- 아카이빙
- 할 짓이 없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내 이 X같은 군 생활의 참담한 실태를 낱낱이 기록하고 박제시키고야 말겠다는 반발감이 ‘기록물로서의 병영일기’를 쓰게 했다. 둘째, 요즘은 휴대전화가 허용된다지만 내가 다닐 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각 잡고 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병영일기를 열심히 썼다. 물론 나중에 상병장급 되어서는 사이버지식정보방(PC방)이나 플스방, 노래방 다니느라 그마저도 관뒀지만.
이렇게 일기에 관한 안 좋은 추억만 가득한 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일기의 진가를 알게 되었고, 어느새 나만의 비밀 사이트에 틈틈이 일기를 쓴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일기 쓰기가 왜 좋을까? 인간적 성숙에 도움이 된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추억을 남길 수 있다, 글쓰기 실력이 향상된다 등 좋은 이유는 찾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런 거창한 이유보다는, 그냥 일기가 ‘매듭’ 같아서 좋았다. 일로, 취미로, 여행으로, 게임으로, 가족과의 시간으로 알차게 풀어놓았던 하루를 그러모아 깔끔하게 매듭짓는, 그런 의식적(ritual) 행위가 내게는 곧 일기 쓰기였다. 마치 내 아름다운 하루를 예쁘게 선물 포장한 기분이 든달까.
나는 어떻게 일기 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을까?
글쓰기에 관한 특강을 다니다 보니 일기를 권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꾸준히 일기를 쓸 수 있는지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일기와 친해질 수 있었지? 그렇게 미뤄대고 싫어했던 나인데.
사실 나는 일기보다는 브런치·블로그 관리가 더 좋았다. 누군가 본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글을 올리면 좋아요가 눌리고, 공유가 일어나고, 댓글이 달린다. 가끔 브런치·블로그 상단이나 포털에 실리는 날은 도파민이 치솟는다. 타인의 관심이 너무 좋아서 또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일기에는 그런 것이 없더란 말이다. 일기는 본질적으로 누구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어렸을 때 여자애들하고 놀다 보면 다이어리 자랑을 들을 때가 있었는데, 거기에 일기를 쓴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일기를 볼 수는 없었다. 하트 모양, 열쇠 모양, 동물 모양 등 다양한 종류의 자물쇠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기란 이처럼 비밀스러운, 나만의 글인 까닭이다.
그래서 일기를 쓸 때는 브런치/블로그를 쓸 때만큼의 재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독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심오한 고찰을 장황하게 늘어놓든, 술 먹고 잔뜩 감성에 취해서 X같은 글을 쓰든 가타부타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브런치·블로그에서는 오랜만에 글을 쓰면 ‘오랜만에 오셨네요~’, ‘요즘 글 안 올리시나요?’ 하는 분들이 있지만 일기에 그런 게 있을 리가. 까짓거 오늘은 귀찮아서 좀 미룬다고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정리하면 일기에는 보상도, 의무감도 없다. 아래의 원칙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자기 자신이 독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꾸준히 일기를 쓰는 비결로 ‘자기 자신이 독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단지 쓰고 방치할 거면 ‘반응이 없어서’ 일기 쓰는 습관이 얼마 가지도 않을뿐더러 자기 성찰이나 인격적 성숙과 같은 이점도 반감된다. 반추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되새겨 곱씹을수록 더욱 의미가 진해지는 법이다.
- 주기적으로 내가 쓴 일기를 다시 보자
- 내가 쓴 일기에 댓글을 남기자
-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뭐라고 댓글을 남겼는지 다시 보자
- 그리고 또 댓글을 달자.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다를 테니 가치가 있다
- 본문과 댓글 타래를 통해 내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눈여겨보
- 번외: 소개하고 싶은 일기는 따로 뽑아 브런치/블로그에 옮기자
비밀 사이트라서 내 일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댓글을 단다. 잘했다, 못했다 평가도 해본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일기에는 좋아요도 누른다.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도 덧붙여 본다. 십 년 뒤에도 똑같이 생각할지 궁금하다며 다시 오겠다고도 댓글을 적어본다.
그렇게 나는 일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찾아올 미래의 나 자신이 교류하며 가까워질 수 있도록(이걸 심리학에서는 자기연속성self-continuity이라고 한다) 말이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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