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지하철에서 ‘네’라고 누르던 내 손가락은, 늘 긴장해 있었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다가 처음 9 to 6 정직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고객사 담당자와 우리 팀이 함께 있는 카톡 방은 출근 전부터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려댔다.
이거 확인 부탁드려요. / 이건 어떻게 진행되나요? / 확인 후 코멘트 주세요.”
대개 아무도 답하지 않거나 정말 급한 사항일 때는 느지막이 팀장님이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 상황을 보며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5분 이상 무응답이면 바로 전화를 걸어 무섭게 짜증을 부리던 몇몇 선배들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사회 초년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러시아워 지하철 안에서 몸도 마음도 호떡처럼 짜부라진 채, 애써 답변을 보냈다. 지하철 안에 묶인 몸이라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성난 불길에 물에 젖은 담요를 덮듯 급히 답장했다.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고 했던가? 24시간 대기 모드로 살아야 했던 생활이 질려 택한 곳이었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사 전, 근무시간에만 응대하면 될 거라는 ‘직장생활 무식자’의 달콤한 상상은 적응 기간이 끝난 후 와장창 깨졌다. 고객사 담당자까지 함께 있는 단톡방에 초대된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 지옥은 여전했다. 공식 업무 시간도 아닌, 출근 전부터 클라이언트의 업무 요청을 받으며 시작하는 하루가 상쾌할 리 없었다. 눈 밑에 먹구름이 점차 짙어지던 어느 날, 팀장님이 말했다.
호사님, 꼭 그렇게 바로바로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클라이언트 쪽 출근 시간이 우리보다 빠르니 그들은 업무 중일 뿐이에요. 그 사람들도 우리 출근 시간이 자기네보다 한 시간 늦는다는 걸 알아요. 서로 바쁘게 일하니 까먹을까 봐 보내는 거니까, 출근해서 확인해도 됩니다.
누군가는 일찍 출근했고, 나는 일찍 불안해졌다. 내 습관성 불안을 일찌감치 파악한 팀장님의 핫팩처럼 따뜻한 말에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덕분에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그 어떤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출근길부터 초조함에 떠는 일은 그날 이후로는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는 순간 최강 전투 모드가 될지언정, 그전까지는 최대한 에너지 절전 모드로 나를 보호하며 출근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지금 당장’ 선택하거나 결정하라는 압박에 놓일 때가 있다.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는 게 민폐 같아서, 기다리게 하는 게 내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쫓기듯 답변을 던지고는 매번 후회하곤 했다. 상대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내가 겁먹어서 성급히 내놓은 결과가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안다. 클라이언트의 근무시간과 내 근무시간에 1시간의 시차가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생각의 시차’가 있다는걸. 누군가는 빠르게 결론에 닿을 수 있는 일이 나는 며칠씩 곱씹어 봐야 결정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단박에 정리할 수 있는 사안도 상대에겐 미적분까지 동원해 계산해야 할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모든 답은 빨리 보다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사이 잠시 기다리는 용기도 어쩌면 일 잘하는 능력 중 하나라는 걸. 무작정 답변하지 않음이 무례가 아닐 수 있다는걸. 서로 다른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내가 나를 지키며 오래 일하는 방식이란 것도.
‘잠시만요’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잠시 숨 고르는 그 몇 시간 사이에, 더 나은 말, 더 단단한 판단, 더 부드러운 표현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관계의 온도’는 결국 그런 기다림 속에서 만들어진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이 속도가 나를 지키고 관계도 지킨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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