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독서 모임에 간다. 발제처럼 딱딱한 의식이나 거창한 식순이 없는 캐주얼한 모임이다. 돌아가며 책 한 권을 추천하고, 읽은 후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여 수다를 떠는 만남에 가깝다.
이번 책은 내가 추천한 『강원국의 글쓰기』였다. 몇 번의 모임을 통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책을 넘어 글쓰기까지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추천했다. 실제로 책에는 글쓰기 초보들이 고민하는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줄 내용이 담겨 있다. 나도 글을 쓰며 헤매거나 방향을 모르겠을 때 수없이 펼쳐 본 책이었다.
내가 추천한 책이어서였을까? 각자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고 난 후 코멘트를 덧붙여야 할 거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한 분의 소감이 끝나고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맞아요. 책이 정말 좋으면 그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잖아요. 그게 진짜 책을 제대로 소화한 게 아닐까요?
글쓰기 책을 읽으니, 글을 쓰고 싶어졌다는 사람들을 향한 응원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 사람에게로 대화가 옮겨 간 후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뱉은 말꼬리를 물고 있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게 일이다 보니 일반 직장인들보다 많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한 달에 몇십 권을 읽었다고 떠든 내가 과연 책 속의 메시지들을 실생활에서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나? 되짚어 보니 낙제점에 가까웠다.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다음 책을 펼치기 바빴다. 내가 뱉은 말대로 충분히 소화하고 음미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 테이블 밑으로 몰래 부끄러움의 하이킥을 날렸다.
정작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을 할지 모르는데, 지나간 말 곱씹기가 취미인 나는 모임이 끝난 지 며칠 지난 지금까지도 책만 펼치면 이불킥을 불렀던 그 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구역의 제일가는 ‘후회의 달인’인 나를 어여삐 여긴 하늘의 뜻일까? 어디선가 나처럼 생각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 뻔뻔 후 용기’가 필요하다는 글을 봤다. 일단 뻔뻔해지고, 그다음에 용기를 내도 된다는 의미다. 난 숨 쉬듯 자기 검열을 하고, 내게 손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이다. 그런 ‘프로생각러’에게 더없이 필요한 말이었다.
말을 할 자격은 누가 주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끄덕이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뭐래?”라고 반박하거나 무시하고 넘길 거다.
말할 자격은 누가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면 된다. 분위기에 취해 뻔뻔하게 내뱉었으니, 수습해야 한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행동을 시작할 때 습관적으로 나를 가로막는 말, “내가 뭐라고”를 지우기로 했다. 대신 그 자리에 ‘선 뻔뻔, 후 용기’라는 말을 채워 넣었다. 일단 뻔뻔하게 내뱉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실천하면 된다.
최근 싸우는 장애인 운동활동가로서, 탈시설-자립 운동과 동물권 등 투쟁의 현실을 담은 홍은전 작가의 책 『나는 동물』을 읽었다. 그 책을 읽었다고 내가 하루아침에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장애인 해방운동에 앞장설 리 없다. 대신 소위 ‘정상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실의 이상함을 자각하며,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발걸음에 공감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
같은 시기에 마스다 미리의 책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를 읽었다. (일종의 병렬독서방식으로 어려운 책을 읽을 때는 쉬운 책을, 아프고 슬픈 책을 읽을 때는 밝고 유쾌한 책을 번갈아 읽으며 호흡을 고른다) 이 책을 통해 먼 훗날, 그리워할 나의 오늘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말고 알차게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100% 흡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읽기 전보다 뭐라도 하나는 건져 내 몸에 습관을 들이다 보면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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