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일주일 차라는 한 신입이 글을 올렸다. 일이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 한 댓글에 오래도록 시선이 멈췄다.
다 그러고 살아.
글쓴이만 유별나게 힘든 것이 아니다. 처음 사회생활 시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힘들다는 뜻이었다. 다들 그렇게 겪고 적응하니까, 한 3개월만 죽어다 생각하고 해 보라는 응원의 말이었다. 자신 또한 여전히 힘들지만, 일한 후 들어온 월급으로 뭐 할지 생각하면서 버티며 산다고. 그 말이 유달리 맴돌았다.
다 그러고 살아.
다 그러고 살아.
다 그러고 살아.
하지만 난 이 말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들어봤던 말이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 밖으로 나와서 상대에게 가닿았을지도 모르는 말이기도 하다. (빈약한 기억력 탓에 절대 이런 말 따위 안 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을 듣고 나면 속이 더부룩했다. 사이즈 작은 신발을 신고 종일 돌아다닌 것처럼 불편했다. 끈적한 마음의 찌꺼기가 쌓였다.
다 그러고 산다는 말 안에 담긴 보편적인 위로와 응원은 심신이 지쳐 꼬일 대로 꼬인 인간의 귀에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다 그러고 산’다며 퉁 치는 위로와 응원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연봉 160억이 넘는 (세상 단 한 사람 아버지만 인정하지 않는) 월드클래스 축구선수 손흥민도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을 때 뚜껑부터 핥고, 글로벌 대기업 회장도 대통령 뒤에서 시장 떡볶이 먹으며 사회생활을 한다. 어나더 레벨의 사는 사람도 아낄 때 아끼고, 하기 싫은 일도 하며 열심히 사는데 내가 뭐라고 힘들다고 징징거릴 짬이나 되냐는 말처럼 들렸다.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긴데 왜 유별나고 예민하게 구냐는 말처럼 들렸다. 너는 뭐가 대단하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데 너만 다르게 살고 싶어 하냐고 혼나는 기분이었다. 상대의 고민과 고통을 누구나 겪는 보통의 아픔으로 치부해 버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아닌데,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나는 별다른 댓글을 달지 않았다. 댓글을 다는 대신, 온라인 말고 오프라인에서 내 곁의 누군가가 슬픈 눈으로 고민한다면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을까 천천히 생각했다.
오래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이때 필요한 건 100개의 좋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입이 까끌까끌해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했다면 따뜻하고 든든한 음식부터 같이 먹는 게 좋겠다. 부드럽고 달큰한 옥수수 크림수프나 감자옹심이 같은, 부담 주지 않는 부드러운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거기에 달달한 디저트를 곁들인 수다 타임이면 어떨까? 귀를 활짝 열어 두고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대신 온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것. 그거면 충분할 거다.
무한 증식하는 괴물 같던 내 안의 고민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으면 마음이 후련하다. 쪼그라든 풍선처럼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타인이 고민을 이야기하면 해답을 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너의 고통이 남들도 겪었던 별거 아닌 경험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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