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가는 길이었다. 신발과 양말 사이에서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언제 들어갔을지 모를 돌이었다. 거울 속 푹 꺼진 얼굴에 흐릿하게 초점을 맞춘 채 칫솔질을 하다 생각했다.
양치 다 마치면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돌을 빼야지.
내가 그 돌을 빼낸 건 퇴근 후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안 벤치에 앉았을 때였다. 신발 속 그 돌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때까지도 돌은 내 신발 속에서 뒹굴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남은 한 톨의 에너지라도 박박 긁어모아 퇴근하는 길, 지하철 벤치에 오래 데친 시금치처럼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상태로 앉아 하루 종일 내 발을 괴롭힌 작은 돌을 뺐다.
신발 속 돌 하나 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종종거리며 산다. 쫓기는 사냥감처럼 위태위태한 상태로 누군가의 말 한마디, 메시지 하나, 메일 하나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평일의 도피처 요가센터도, 주말의 은신처 산에도 간 지 한참이 됐다. 갈까 말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상의 루틴이 된 곳들도 방전된 체력으로는 무리였다.
요가 매트를 깔다가 평소였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바닥 세로줄에 비스듬하게 깔린 게 신경 쓰였다. 몇 번이고 매트를 들었다 놨다 하며 줄을 맞출 때부터 예민지수가 차오르는구나 자각했다. 피곤이 넘치다 못해 흘러나오는 얼굴은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었던 걸까? 3년 가까이 나를 봐 온 요가 선생님이 말했다.
회원님, 몸이 이 상태면 요가보다 일단 집에 가서 쉬셔야 해요.
걱정 가득한 선생님의 말을 듣고 뭔가 기분이 묘했다. 공식적 땡땡이를 허락받았지만 마냥 신나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진이 빠져 집에 가서 뻗기 바쁘다. 물에 젖은 니트처럼 무겁게 축 처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돌아오면 씻고 일단 눕는다. 잠깐만 누웠다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지, 하지만 다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밤 9시에서 10시 사이면 잠이 든다. 그대로 아침까지 숙면에 들면 좋겠지만 밤새 3~4번은 깬다. 밤 12시, 2시, 4시 선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새벽에 눈을 떠도 개운하게 일어난 적은 드물다. 누워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많은데도 피곤한 이유는 잠의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었는데 귀가 다시 활짝 열렸다. 방문 앞 식탁에서 엄마, 아빠가 평소처럼 수다 떠는소리였다. 비몽사몽 상태로 일어나 문을 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쫌! 시끄러워!!
끓어 넘치는 순두부 뚝배기처럼 화르르 시뻘건 소리를 내 지르고 다시 자리에 누워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한 거지? 연로한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목소리가 과하게 컸다.
단지 체력이 달린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족한 체력은 예민과 1+1 한 세트다. 뭐가 잘났다고 바깥에서 가진 에너지를 쓰고 집에 돌아와 인간 고슴도치라도 되는 양 삐죽삐죽 가시를 세우는 걸까? 자괴감을 머릿속에서 뱅뱅 굴리다 사과할 타이밍을 놓친 채 다시 선잠이 들었다.
휴대전화 설정 앱에 빨간색 알림 메시지가 떴다. 배터리 성능이 떨어졌으니 교체하라는 내용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날카로운 행동과 말을 한다는 건 일종의 방전 상태를 알리는 ’ 알람‘일지 모른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 배터리 성능이 떨어졌으니 아무리 충전해도 금방 방전될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 배터리를 교체하려면 A/S 센터에 가면 되지만, 에너지 배터리 성능이 떨어진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까? 배터리만 교체하면 다시 쌩쌩해지는 휴대전화처럼 내 몸과 마음의 배터리를 꺼내 새 걸로 교체하고 싶다.
휴일. 모자란 잠을 더 자도 되는 날이고 몸도 천근만근이었지만 평소처럼 일어나 간단히 밥을 먹고 가방을 챙겼다. 한동안 신발장 구석에 잠들어 있던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 방송을 들으며 집에서 멀지 않은 산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계곡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얼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녹고 있었다.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인내심, 다정함, 집중력, 친절함 등등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방전된 체력을 키우기 위해 뭐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축 늘어져 있다 보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성향의 나를 바로 세워주는 건 누군가의 강요나 명령이 아니라 척추기립근이니까.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몸에 좋은 것도 챙겨 먹으며, 종종 머리에 신선한 바람도 넣어 주는 여유를 악착같이 챙기기로 다짐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몸과 마음의 체력을 기르는 일, 그게 이 계절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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