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울 보는 시간이 늘었다. 원인은 머리카락에 난 색깔이 다른 층. 이마 찌푸리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뿌리 염색을 할 타이밍이 온 거다. 내 발은 늘 가던 미용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수년째 머리를 맡기는 헤어 디자이너가 독립해 새로 오픈한 숍이다. 오랜 미용실 유목민 생활을 접게 해준 고마운 분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
언제나 반가워해 줬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 반가운 표정과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가방과 겉옷을 맡기고 자리로 안내받았다. 염색할 준비를 하는 사이 거울에 비친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가 그간 알아 왔던 헤어 디자이너의 성격을 똑 닮았다는 게 느껴졌다. 아담하지만 알찬 자신만의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신중한 고민의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었다.
내부를 훑던 시선은 어느새 헤어 디자이너를 돕던 어시스턴 급 스태프에게 멈췄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마 숍을 오픈하며 새롭게 손발을 맞추게 된 사이인가 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친절함은 충분했지만 친밀함까지는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헤어 디자이너와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첫 숍 오픈을 준비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었는지 간간이 수다를 주고받는 사이 머리카락에는 염색약이 고르게 발라졌다. 염색약이 머리에 스며들기를 잠시 기다린 후, 머리카락을 씻어낼 차례다. 스태프는 조심스럽게 나를 샴푸실로 안내했다.
내가 샴푸대에 머리를 눕히자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고, 물 온도는 어떤지 세심하게 물었다.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두피를 문지르며 샴푸를 했다. 거품을 물로 헹구고, 물기를 짜냈다.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바르는 영양제가 어떤 효능이 있는지 설명해 주며 두피 마사지를 시작했다.
눈과 코, 두피를 따갑게 하는 각종 화학약품, 시끄러운 드라이기 돌아가는 소리, 자잘한 머리카락이 날리는 텁텁한 공기 등등 미용실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장거리 노선 비행기를 탔을 때만큼이나 괴롭고 지루하다. 하지만 두피 마사지를 하는 그 시간만큼은 다르다. 긴 비행 끝에 목적지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 바퀴가 닿는 그 순간처럼 설레고 기다려진다. 항상 머리가 무겁고, 뜨거운 편이라 그럴까? 고작 두피를 눌러 주는 것일 뿐인데도 뇌 속까지 말끔히 물청소를 한 듯 개운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번은 달랐다. 가려운 곳은 발바닥인데 저 멀리 팔꿈치를 긁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스태프는 열과 성을 다해 머리 구석구석을 누르고, 문지르고, 두르려 주는데 어느 한 곳도 개운한 느낌이 없었다. 두피를 매만지는 순간 잠시나마 무릉도원 견학을 보내주던 이전 스태프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리운 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난 머리를 맡기고 누워 있는 동안 신참 스태프의 손길에서 어쩔 수 없는 초심자의 한계를 느끼고야 말았다.
허둥지둥. 우당탕탕. 어색어색. 이런 단어들이 뒤섞인 초보의 시간. 온몸의 감각을 새로운 일터의 기준에 맞추고 손에 익지 않은 일을 익히는 데 쓰느라 한껏 날이 서 있던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요령 없는 열심’으로 채운 하루를 마치고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집으로 겨우겨우 끌고 와 이불 위로 내던지는 시절. 새내기 스태프에게는 아마 지금이 바로 그런 시간일 거다. 두피 마사지를 받는 내내 나의 초보 시절이 떠올랐다.
본업에서 초짜였던 시절이 있고, 지금도 대다수의 분야에서 초보 특유의 열심뿐인 열심 모드를 장착한 채 살아가는 중이다. 왜 빨리 결과를 내지 못하느냐는 다그침보다 느긋한 기다림이 그 시절의 내겐 더 도움이 됐다. 다그침은 이미 내 안에서 나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으니까.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릴 때마다 꼭 그만큼 내겐 ‘실력이 없다’는 차가운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야심 말고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채찍보다는 느슨한 당근이 효과가 좋았다.
‘열심’은 초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걸 안다. 그래서 굳이 이렇다 저렇다 두피 마사지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말을 얹고 싶진 않다. 초보 스태프 역시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못 하는 것일 뿐일 테니까. 정말 노련한 기술자라도 일부러 실력을 숨기기는 쉽지 않으니까. 손님들이 원하는 마사지의 강도와 포인트를 단번에 찾아가는 경험을 쌓고 기술을 배우는 중이리라 믿는다.
‘나만의 스킬’이 생길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경험과 연륜이 쌓여 그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는 상태 말이다. 스스로 치열하게 부딪히고 고민하고 깨우치기까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들 거다. 각종 벽을 맞닥뜨리며 이 길로 들어선 자신의 선택과 애초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재능을 의심하는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열심뿐인 열심이라도 하다 보면 파박! 스파크가 튀듯 실력이 늘어나는 순간은 분명 온다.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내가 얻은 대부분의 결과가 그랬고 지금도 어느 분야에서는 그 결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그 끝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음번에 미용실에 왔을 때 스태프의 실력이 얼마만큼 늘었을까? 두피 마사지로 무릉도원 내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문고리를 잡을 수 있을까? 언젠가는 오고야 말 그 시간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또 응원한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