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16년 여름, 갓 신입사원이던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서 ‘성과평가’라는 것을 했다. 당시 나는 입사한 지 6개월 차의 병아리 사원이었기에 성과를 냈다고 적을 만한 게 없었다. 사수가 쓰는 것을 보고 거의 따라 쓰며 성과평가라는 걸 배워나갈 때였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성과를 표현하는 일이 낯설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더 어려운 건 그다음이었다. 바로 상사 평가!
상사 평가
항목별로 지점장인 상사의 점수를 매기고 경영이념에 맞춰 상사의 장단점을 줄글로 서술해야 했다. 다행히 객관식 항목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모두 만점을 주면 된다길래 만점을 주었는데, 문제는 줄글로 서술해야 하는 장단점 부분이었다.
그나마 장점을 쓰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거나 있어 보이는 경영이념을 풀어서 지점장 얘기인 것처럼 쓰면 그럴싸하니깐. 문제는 단점이었다. 단점은 많지만 이 단점을 어떻게 포멀한 단어로 풀어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다가 결국 사수에게 단점을 ‘없습니다.’ 혹은 공백으로 두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그럼 상사 평가의 의미가 없기에 무조건 내용을 적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사수는 신입사원의 첫 성과평가가 걱정되셨는지 꼭 다 쓰고 본인에게 최종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 나의 성과평가 부분까지는 OK를 받았다. 문제는 그다음 상사 평가의 단점 부분인데…아무리 생각해도 단점을 단점 같지 않게 써야 하는 이 부분이 정말 어려웠다. 단점은 진짜 많은 게 그중 무엇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ㅎㅎ
그렇게 곰곰이 지점장의 단점으로 적을 만한 일들을 떠올려보는데 생각해보면 지점장이 너무 말이 많아서 회의를 한번 시작하면 2시간씩 회의할 때도 있곤 했다. 한여름에 그렇게 회의실에 거의 20명이 모여 회의를 하고 나며 얼마나 숨이 막히고 땀이 나는지 모른다. 가끔은 회의가 끝나고 일어나는데 엉덩이에 땀이 나서 바지가 젖진 않았는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밀폐된 회의실에 20명이 2시간을 갇혀 회의하고 나면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띵해지고 2시간이나 흘러있어 업무는 업무대로 밀려 야근하기 일쑤였다. 긴 회의는 결국 직원들의 체력을 고갈시키고 업무 의욕을 상실시키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유의미한 회의도 아니었다. 지점장의 잔소리와 지적이 난무했기에 오디오의 90%는 지점장의 차지였다. 그래서 가장 구석에 앉아 있기만 했던 신입사원 눈에도 긴 회의에 지쳐 넋이 나간 선배들이 보였다. 그래서 떠오른 한 문장, ‘말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상사 평가의 단점에 녹여냈다.
긴 회의로 인해 직원들의 업무 효율이 저하됩니다.
나름 신입사원으로서 어미에도 상사에 대한 예의를 갖춰 마무리했다. 그런데 이건 아주 비밀스러운 나만의 상사 평가이기에 사수에게 보여주고 검사받기도 애매했다. 정말 순진하게 나와 인사팀만 보는 나만의 상사 평가라고 생각했기에… 수줍게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모든 직원이 하는 생각을 내가 깔끔하고 포멀하게 적었다는 마음에 뿌듯함도 들었다.
그러나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사수는 내게 자기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눈치 없고 솔직하게 상사 평가를 보낸 것에 화를 냈다. 알고 보니 상사 평가에서 단점은 장점 같은 단점으로 적어야 했다. 왜냐면 이건 토씨 하나 정제되지 않은 날 것으로 지점장에게 바로 전달되니 말이다…ㅎㅎ 20명이 하는 평가였기에 지점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가 썼는지 유추해낼 수 있었기에 이 상사 평가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평가였다. 무조건 만점을 주고 장점들을 단점인 척 적어 내는 과제일 뿐 진정한 상사 평가가 아니었다.
신입사원이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주 솔직히 상사에 대한 피드백을 적은 거다. 아니 이럴 거면 이게 왜 있는 거야… 싶었지만 원래 이런 꼰대 기업에서는 이런 형식적인 형식이 굉장히 중요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미 상사평가를 여러 차례 해본 선배들은 모두 다 ‘~임’ ‘~하였음.’으로 어미를 축약했기에 공손한 어미는 누가 봐도 처음 해본 신입사원의 소행임이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수는 막내가 대장에게 원펀치를 날렸다며 이렇게 쓴 직원은 너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내 딴에는 정말 고르고 골라 회사용어로 공손하게 적은 것인데 이게 원펀치라니…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더 포장을 해야 하는 건가…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회의에서 몇 개월간 자기반성 없이 몇 시간을 떠들며 혼을 빼던 지점장이 고작 1시간을 떠들고 회의를 종료하려 했다.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안 되니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아차 싶었다… 그도 누가 썼는지 대충 가늠이 된다는 눈치이었기에 괜히 나를 바라보며 하는 말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을지도… 지점장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말이 많았다. 우리는 늘 인질처럼 회의실에 붙잡혀 있기 일쑤였다. 결국 내게 첫 상사 평가는 직원들의 상사 평가로 상사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 직장생활에서는 바른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큰 교훈을 주었다. 형식에는 형식적으로 답하는 게 직장생활에서 말하는 눈치라는 것이니…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어느새 상사 평가에서 단점 같지 않은 단점을 그럴싸하게 적어내는 나를 보면 괜히 사회 생활에 흑화된 거 같아 애잔하기도 하다. 그러니 눈치 없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신입사원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귀엽게라도 봐줄 수 있으니… 서툴지만 순수한 그 눈치 없는 순백의 시간…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더 크게 적을 거다.
말이 너무 많으셔서 회의 끝나면 바지가 땀으로 젖어요!!
원문: 작은버섯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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