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눈을 감고 게으른 사람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게으름 상’이란 어떤 모습인가?
-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감자칩을 까먹으며 배를 드러내놓고 휴대폰 만지작거리는 누군가
- 시험 전날인데 책상에 교재는 펴놨지만, 그 옆에서 컴퓨터 켜고 자정이 다 되도록 롤만 하고 있는 누군가
- 오후 2-3시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아점저(?) 먹어주고 하품 찍찍하면서 다시 드러누워 있는 누군가
내가 떠올린, 전형적인 게으름은 위와 같은 모습이다. 구체적인 맥락은 다를 수 있겠으나 아마 여러분들도 나와 비슷한 상상을 하셨을 것이다. 생산적인 일 안 하고, 먹고 놀고 자고, 어딘가 굼떠 보이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런데 문득 위화감이 든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자. 위의, 우리가 상상했던 전형적인 게으른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인가? 아닐 것이다. 어쩌다 그런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여러분은 꼬박꼬박 학교·회사 다니고, 적당히 공부·일하고, 적당히 게으름 피우며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턱대고 게으르게 살지 않는다. 아침에 딱 십분 더 미적거리고, 학교·회사에서 몰래 휴대폰 한 번 더 보고, 집에 와서는 일단 냅다 침대에 몸을 던지고 보는, 그런 정도의 게으름일 것이다. 이만하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그래도 할 건 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충분히 부지런하다.
근데, 전 아무래도 게으른 게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몇 년간 게으름을 주제로 강연 다니면서 정말 많이 들었던 말들이다. 허구한 날 노는 사람도 아니면서, 나름대로 ‘밥값’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게으름을 걱정할까.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으면서 운동 안 갔다고, 자기 계발 안 했다고, 집안일 미뤘다고 자신을 ‘게으르다’고 말한다. 이 위화감은 뭘까. 우리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게으름이란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게으름은 ‘우선순위’와 연관이 있다
나는 요즘 육아하느라 바쁘다. 얼마 전부터 아내가 바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나의 육아 비중은 늘어났다. 누군가 요즘 내 모습을 본다면 절대 ‘게으르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아기가 새벽에 이따금 깨서 우는 바람에 밤마다 쪽잠을 잔다. 그럼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기 젖병도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나와 아내가 먹을 식사도 준비한다.
이후 잠깐 휴식이라도 취하려 하면 빨래 다됐다는 세탁기 울림이 들린다. 그럼 어제 널어놓은 빨래 개어놓고 새로 빨래를 말려야 한다. 이렇듯 요즘 나는 일분일초도 맘 놓고 쉬지 못하고 빈틈없이 몸을 놀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요즘의 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웃기지 않은가. 맨날 잠도 잘 못 자고 계속 ‘일’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게으름 타령이라니.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은 어쩌면 내게 동정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육아 하나만 하기도 얼마나 힘든데요’ 아마 이런 감사한 말씀과 함께 나를 격려해 주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게으른 것이 맞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름의 이유를 대 보고자 한다.
줄글로 쭉 써놔서 엄청 바빠 보이지, 사실 육아 틈틈이 업무 할 시간은 있다. 글도 쓰고, 외주 작업도 하고, 강연 준비도 하고, 심리검사도 개발한다. 회사 다닐 때보다 돈을 더 번다는 건, 육아하면서도 사실 그만큼 업무에 투자할 시간적 여유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나는 자꾸 일을 다른 일로 대체한다. 자투리 시간이 생겨도, 아빠 일하라며 알아서 낮잠도 길게 잘 자주는 딸아이의 배려(?)가 있어도 나는 그 시간에 업무를 안 한다. 굳이 쌓이지도 않은 빨래나 한 번 더 돌리거나, 바로 조금 전에 걸레질한 바닥이나 한 번 더 닦고 있다. 그마저도 할 게 없으면? 괜히 아기 옷 서랍 열어서 옷마다 칼각이나 잡고 앉아 있다(…)
나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일을 미뤄버린다. 온갖 바쁜 척을 하며 안 게으르다며, 난 육아에 최선을 다하느라 업무를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며 주변과 자신을 속이고 있으니, 맨 처음 이야기했던 전형적인 ‘게으름 상’보다 더 악질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업무 → 집안일 → 휴식 → 업무 → 집안일
이래야 하는데, 우선순위를 고의로 조정하여 다음과 같이 게으름을 교묘히 감추는 것이다.
집안일 → 집안일 → 휴식 → 업…무?
주변을 잘 살펴보자. 나와 같은 유형의 게으른 사람들이 회사 곳곳에 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엄청 바빠 보인다. 늘 어딘가에 열중해 있고, 전화는 계속 붙들고 있고, 바빠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가 뭘 했느냐, 냉정히 따져보면 별로 해놓은 게 없다.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제발 기한 좀 지켜달라고, 열심히 좀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막상 찾아가서 보면 겁나 바빠 보인다(…) 여담이지만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자기 세뇌에 성공하기도 한다. 별로 안 중요한 일에 몽땅 시간을 다 쓰며 게으름을 부려놓고도 어쨌든 자기는 업무시간에 논 게 아니니까, 자기만큼 바쁘고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다며 겁나 성과 어필해 댄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게으름을 볼 수 있다. 여러분도 공감하는가? 공부를 열심히는 하는데 정작 성적이 잘 안 나오던 친구들 말이다. 그들 중 일부는 재능의 한계로, 환경이 안 받쳐줘서 등의 이유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학생들은 고의로 우선순위를 조정, 안 게으른 척 연기하면서 게으름을 피운다. 자신 없는 수학, 과학은 저 멀리 미뤄버리고, 그나마 자기가 할만한 영단어 외우기에만 온갖 시간을 다 써버린다.
열심히 사는데도 자신이 게으른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대개 원인은 둘 중 하나다. 의욕과 열정이 엄청나서, 정말 그 일에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정작 중요한 일은 미뤄놓고 애먼 곳에만 시간을 쏟고 있거나.
후자와 같은 교묘한 게으름뱅이보다는 차라니 전형적인 게으름뱅이가 더 낫다. 적어도 전형적인 게으름뱅이는 자기 욕망에 솔직하니까. 방바닥에 드러누워 하루 종일 잠만 자면 어찌 됐든 개운하기라도 하다.
반면 교묘한 게으름뱅이들은 잘 쉬지도 못한다. 뭔가 열심히 하긴 해야겠기에 스스로를 계속 닦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겠는가. 방향 자체가 틀려버린 것을.
2줄 요약
- 전형적 게으름뱅이: 게으름
- 교묘한 게으름뱅이: 게으름 + 안 게으른 척 자신과 타인을 기만 + 억울함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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