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중독이 뭔가요?”
중독, 하면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흔히 술, 담배, 마약 같은 물질중독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또 다른 중독 유형인 ‘관계중독(relationship addiction)’을 지적한다. 이는 물질중독이 아닌 행위중독의 일종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관계중독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굳이 그런 개념이 필요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쇼핑 중독이나 마약 중독만큼 해로워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계중독인 사람들은 늘 주변에 사람들이 많고, 인맥도 풍부하며, 외로움을 덜 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둘째, 이건 학술적인 문제인데 ‘관계중독’이 다른 유사한 개념들을 놔두고 굳이 독자적으로 따로 구분 지어 써야 할 이유가 있는 개념인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심리학자들은 개념·이론들이 남발되는 것을 싫어한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심리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가급적 적은 개념·이론만으로도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일이다).
애착, 의존성 성격장애, 친밀한 관계, 사회적 지지, 헌신적 관계, 스토킹 등 타인에 대한 열망을 설명하는 다른 개념들은 이미 많다. ‘관계중독’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다른 어떤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 관해 관계중독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술에 중독되는 것처럼, 쇼핑에 중독되는 것처럼, 단 음식에 중독되는 것처럼 ‘관계’에 대해서도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때로 가까운 관계가 ‘중독’으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중독자들이 경험하는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계 중독’을 겪는 사람들의 몇 가지 특징
관계중독자들은 강렬한 ‘갈망’을 경험한다. 퍼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기분이랄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집착하는 그 관계 속에 시간과 돈,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는 특징이 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특정 관계 하나에 모든 것을 ‘몰빵’하지 않지만, 이들은 무엇이든 다 내어줘야지만 온전히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착각을 갖는다.
잠깐만 연락이 닿지 않아도 안절부절못한다. 초 단위, 분 단위로 왜 연락이 안 되냐, 무슨 일 있냐, 나 무시하는 거냐, 제발 연락해라, 폭탄 문자를 보내며 상대를 들들 볶는 것이 관계중독자들의 특성이다. 왜 그럴까? 관계 경험을 충족하지 못할 때의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관계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 공허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일쑤이다.
3. 통제 결여
때로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관계에 대해 갖는 이러한 집착이 비정상적인 것임을 인식한다. 그래서 이제는 좀 집착을 줄여보고자 나름대로 노력을 해본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상대에 대한 관심을 끊기가 어렵다. 자꾸만 돈과 시간을 퍼붓고 싶어서 견디기가 어렵다. 통제를 위한 노력의 반복적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관계중독자들의 특징이다.
4. 일상생활의 어려움
오로지 인생의 목적이 ‘그 한 사람’으로 고정되고 만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학교나 회사에서도 도통 집중하질 못한다. 심각한 경우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상대와의 관계에 집착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관계중독자들은 더 절박해진다. 이제는 진짜로, 저 사람 아니면 난 살아갈 수 없다는 극단적인 신념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중독’과 ‘의존성 성격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를 혼동한다. 그러나 두 상태 모두 타인과의 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특징을 공유하지만, 이 둘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관계중독자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라면, 의존성 성격장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다.
관계중독자들은 자신이 헌신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자기가 하는 것만큼의 헌신을 원하고 요구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관계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상대의 생각과 의견에 자신의 행동을 굳이 맞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느낌일 것이다. 관계중독자들은 진심으로 상대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자기 자신의 헌신적인 모습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의존성 성격장애의 경우, 상대에게 모든 결정을 넘긴다는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혼자서는 그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심지어 상대방에게 어떤 종류의 애정과 노력을 쏟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대방의 승인과 지지 없이는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관계중독자들은 상대의 반응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아낌없이 퍼부어댈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좋고, 거기에 어울려주는 상대방이 좋을 뿐).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중독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나름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감정을 조절한다거나 건강하게 타인과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노력은 좋다. 필요하다면 자신과 단단히 약속을 걸고 하루 몇 분 이상은 상대에게 연락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의 실천과제를 내걸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될까? 솔직히 나는 회의적이다. 관계중독이 술 중독·마약 중독·쇼핑 중독·도파민 중독 등 다른 여타 중독들과 증상을 공유한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마저 비슷하지 않을까?
술 중독이 말로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 담배 중독이 단지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 전문가 등 제삼자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적극적으로 개입, 처치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 특정 관계에만 지나치게 몰두되어 있다면
-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생길 수준이라면
- 금단 증상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낀다면
이별은 답이 아니다. 아마 하라고 해도 못할 거다(마치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 끊는 게 답이다’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보다는 누군가가 이별을 도와줄 수 있도록, 이별 이후 다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원문: 허용회의 사이콜로피아
홍보
- 글쓰기, 메타인지, 자존감, 동기부여, 게으름 극복, 마음건강 등에 관한 직접 강의나 외부 출강을 다닙니다.
- 그외에도 재미있겠다 싶은 강의면 심리학을 응용하여 뭐든 다루고 있습니다.
- 심리학 대학원 입시 전략 설명회도 정기 진행합니다.
위의 내용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허작가의 사이콜로피아 홈페이지(바로가기)를 확인해 주세요.
유튜브
제 브런치스토리의 글은 유튜브(바로가기)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필자의 다른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