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가장 빠르게 기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확천금을 쥐어주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빠르게 절망에 빠트리는 방법은? 손에 쥐어준 일확천금을 빼앗는 것이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병뚜껑 하나만 있어도 할 수 있다. 언제나 일확천금 일생일대의 꿀벌을 꿈꾸는 마시즘. 오늘은 펩시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하나의 재난을 돌아본다.
코카콜라를 이기기 위한 최후의 수단
시간과 장소를 돌려본다. 1992년 필리핀이다. 당시 필리핀 펩시는 걱정이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음료를 많이 마시는데, 펩시는 코카콜라에 비해 턱없이 낮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여러 방안을 찾아보다가 하나의 이벤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병뚜껑에 경품이벤트를 걸자.
‘넘버 피버(Number Fever)’라고 불린 이벤트의 내용은 이렇다. 펩시(와 7-up, 마운틴듀, 미란다 같은 펩시음료들) 병뚜껑 안에 3자리의 숫자를 인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오후 뉴스에서 숫자를 발표하여 상금을 주는 복권 같은 이벤트다.
대부분의 상금은 100페소(당시 약 4달러)였다. 하지만 1등은 무려 100만 페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00만 페소는 필리핀 평균 월급의 600배 가까운 금액이었다. 심지어 복권보다도 당첨확률이 높았다.
넘버 피버는 대성공을 거뒀다. 4개월 만에 펩시의 음료시장 점유율은 19.4%에서 24.9%로 늘었다. 필리핀 국민의 절반 이상은 매일 펩시의 넘버 피버 발표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코카콜라는 긴장했고, 펩시는 이 현상을 즐겼다. 마지막 100만 페소의 주인공이 발표되기 전까지.
100만 페소의 주인공의 정체
시점을 바꿔본다. 1992년 당시 20대 여성이었던 ‘마릴리 소(Marily so)’는 4명의 아이를 기르는 엄마였다. 아이들은 펩시의 이벤트를 재미있게 보았지만, 그녀는 이것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같이 발표되는 당첨자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내가 1등의 주인공이 된다면?
어림없는 소리였다. 마지막 1등이 발표되는 1992년 5월 25일 오후 6시 텔레비전 밖으로 당첨자 번호가 발표되었다.
349번. 그녀가 가진 병뚜껑의 숫자였다.
가난을 벗어나는 순간을 알게 되자 환호의 비명을 질렀다. 드디어 내 인생은 바뀌는구나. 그런데 옆집에서도, 옆동네에서도 환호성이 들렸다. 이게 뭐지?
그렇다. 349번 병뚜껑을 가진 사람은 약 80만 명이었다.
펩시에 당첨자들이 쏟아져왔다
펩시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공장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부터였다. 그제야 펩시는 상황파악을 했고, 2개만 인쇄되어야 할 349번 병뚜껑이 컴퓨터의 오류로 대량생산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펩시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80만 명(어쩌면 그보다 많을 사람들)에게 100만 페소(당시 약 40,000달러)를 주는 것은 펩시로서도 무리였다.
펩시는 신문기사에 당첨번호를 134번으로 바꾸려고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이미 전 국민이 본 뉴스의 당첨번호를 무를 수는 없었다. 펩시의 공장 앞에는 100만 페소를 달라는 당첨자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다음날 펩시는 잘못 인쇄된 과정을 투명하게 밝혔다(보안코드까지 맞는 번호는 2개였는데 349란 숫자가 적힌 병뚜껑이 대량생산 되었다). 그리고 2주 동안 349번 병뚜껑을 가져온 사람에게 500페소를 지급하겠다는 합의안을 내놓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고 500페소를 받아갔다. 펩시는 계획된 예산 이상의 값을 치러야 했지만 이 사태를 해결한다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공장에 돌이 날아왔다. 그리고 트럭에 불이 붙었다.
테러의 도화선이 된 349 사건
당시 필리핀은 빈곤이 만연했다. 그러한 경제상황 내에서 ‘넘버 피퍼’는 하나의 꿈이었다. 한때 이 꿈을 이루기 위해 펩시를 마셨던 사람들은 배신감에 공장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펩시 공장은 돌과 화염병에 작동이 중지가 되고, 35대가 넘는 펩시트럭이 불에 타버렸다.
펩시는 공장건물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펩시의 경영진은 경호원들을 고용해야 했다. 시위대에 있다가 노령으로 목숨을 잃은 한 노인은 ‘유령이 되어서도 펩시와 싸우겠다’라고 밝혔다고 했다. 당시 필리핀이 미국에 가지고 있는 반감 역시 하나가 되어 펩시 보이콧을 넘어선 반미운동으로 번졌다.
경찰과 군대가 동원돼도 멈추지 않는 펩시에 대한 테러는 곧 ‘사제 폭탄’이 던져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펩시 트럭에 던진 이 폭탄은 불행하게도 도보로 튕겨 나와 많은 사상자를 냈다. 5세 어린아이와 교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필리핀 무역부는 펩시에 15만 페소의 벌금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재를 했다. 시위대는 약 4억 달러 규모의 집단소송을 펩시에 걸었다. 1994년까지 689건의 민사소송, 5,200건의 형사소송이 벌어졌다.
하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컴퓨터 오류로 인한 이 사건은 펩시의 과실이 아니며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잃어버린 민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한동안 필리핀에서는 ‘349ed’라는 속어가 생겼다. 이 단어의 뜻을 이렇다.
속았다.
쉽게 만들어진 이벤트는 큰 후유증을 난다
의도치 않았던 실수가 불러일으킨 재앙. 이것은 펩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언젠가 혹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펩시 349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초조한 욕심은 실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게 위해 쉽게 계획된 행동은 더욱 쉽게 꺾이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은 함부로 건드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 는 3년 뒤에 미국 펩시가 숫자계산을 잘못하여 ‘전투기’를 헐값에 살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하고 마는데…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Number Fever: The Pepsi Contest That Became a Deadly Fiasco, Jeff Maysh, Bloomberg, 2020.8.4
- The bottle cap snafu that nearly cost Pepsi $32 billion, CBC Radio, 2022.4.13
- Rage, Riots, and Death: Looking Back at the Pepsi 349 Debacle, PAUL JOHN CAÑA, esquire Philippines.202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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