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문구를 94년 신병교육대 건물에서 처음 보았다. 훈련소 건물 벽면에 붉은색 궁서체로 크고 또렷이 박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문구를 보면서 참 그럴듯하다고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형적인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였던 것 같다.
태도와 태도, 태도와 행동이 서로 일관되지 않거나 모순이 존재할 때 겪는 심리적 불편함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인지부조화를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해소하고 태도와 행동 간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태도와 행동 중 바꾸기 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바꿔 일치시킨다.
인지부조화의 고전적 실험 하나를 소개한다. 심리학 실험에 참가한 당신은 정말 재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단순반복작업을 한 시간가량 실행해야 한다. 지겨운 작업을 마치고 나니, 실험자가 다가와 다음 실험에 참가한 사람에게 이 작업이 재밌었다고 말해달라는 부탁을 듣는다. 당신은 이 부탁을 수락하기로 하고, 다음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재밌는 실험에 참가하게 될 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 이후, 실험자는 고맙다면서 당신에게 1만 원을 준다. (1시간 시급)
- 이후, 실험자는 고맙다면서 당신에게 20만 원을 준다. (1시간 시급의 20배)
이 모든 과정을 마치자 당신이 참가한 실험이 얼마나 재밌었는지 묻는 설문이 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 ‘실제로’ 재밌었다고 응답할 확률이 높을까?
사람들은 2보다는 1에서 작업이 진실로 가치 있고 재밌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높다. 20만 원은 거짓말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1만 원은 거짓말을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태도와 행위의 일관성이 무너지면, 재밌다고 말하는 행위를 바꾸거나 지루한 작업이 재밌었다고 태도를 바꿔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참가자에게 말해 버린 행위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태도를 바꾸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20만 원을 받은 상황에서는 태도나 행위가 일치하지 않은 게 충분히 설명이 된다. 거짓말을 하는 대가로 20만 원은 꽤 괜찮은 보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만 원은 거짓말을 하는 대가로 충분치 않다. 한 시간을 생고생했는데 겨우 1만 원 받고 거짓말까지 해야 하다니 불편한 심정이 된다. 이때 사람들은 태도와 행동 간의 부조화를 느끼게 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미 뱉은 말을 철회하기보다는 태도를 바꾸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물론, 행동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것도 인지부조화 해소에 해당한다. 상대적으로 바꾸기 쉬운 것을 바꾸는 것이 인지부조화 해소의 핵심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가 대표적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훈련병 시절, 잔반을 집어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너무 고팠고, 나도 모르게 걷다 쓰러져도 왜 쓰러지는지 모를 만큼 잠이 부족했으며, 잡아 죽일 듯한 교관과 조교의 윽박으로 공포감에 휩싸였던 내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비록 내가 겪는 환경이나 행동은 결코 즐거움과 거리가 있지만, 이걸 정신과 신체를 단련시켜 나한테 이로운 활동이라고 생각하면 즐길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사실, 성장 마인드셋이나 긍정심리학 등 심리학의 많은 개념들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고 있다. 조직심리학의 ‘잡크래프팅(job crafting)’이란 개념 역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의 장점을 증명하고 있다.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 조직심리학자인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Amy Wrzesnievski)와 미시간대학교 로스비즈니스스쿨의 조직심리학자인 제인 더튼(Jane Dutton)은 일 자체를 도전적으로 바꾸는 시도를 ‘잡 크래프팅’이라고 명명했다. 브제스니에프스키와 더튼은 ‘일의 의미’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다 대학병원 청소 근로자들을 인터뷰하던 중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청소라는 동일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청소 근로자들이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달랐던 것이다.
자신의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환경 미화원들은 자신의 업무가 환자들이 빨리 낫게 돕는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환자들의 병세를 호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병실 벽의 액자를 바꿔 달거나, 환자나 환자 가족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등 직무 기술서에 없는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누워있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 천장을 자주 살피기도 했다. 청소라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개인의 웰빙과 성과에 매우 중요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조직에서 정답인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 연구들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의 부작용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2022년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조직심리학자인 아담 그랜트(Adam Grant) 등의 연구진은 잡크래프팅과 성장 마인드셋의 상호 작용에 관한 연구를 응용심리학저널(Journal of Applied Psychology)에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에 해당되는 IT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현장 실험을 진행했다. 이중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성장 마인드셋과 자신의 직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잡크래프팅 둘 중 하나만 있는 사람들은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다.
-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직무에서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불행했다.(아래 그래프에서 Self 그룹)
- 직무에 의미를 부여하고 변화를 만들었지만,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처음 한 달 정도는 행복감이 증가했지만 지속되진 못했다(아래 그래프에서 Job 그룹).
결국,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눈앞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훈련소 벽면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문구를 보면서 나를 비롯해 내 훈련병 동기들은 한때는 이 문구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대 배치를 받고 군대 돌아가는 꼴을 알고 난 후로는 문구를 볼 때마다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철모(방탄모) 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이 문구는 어느샌가 연예인 사진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태도만으로 일의 열의를 지속하긴 어렵다. 업무의 의미, 업무상 관계, 실제 업무의 변화나 확장 등의 업무 영역에서 변화가 따라야 비로소 현재를 즐기는 태도가 의미가 있다.
- 실제 연구에서도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과 실제 업무를 변화시키는 과정 모두를 경험한 구성원들은(위 그래프에서 Dual 그룹)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감이 높아졌다.
만일 당신의 조직에서 비전과 가치 전파를 통해 구성원들의 마인드셋 함양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냉소적인 반응이 만연하다면 이번 글에서 소개한 〈Getting Unstuck〉 연구를 꼭 참고하길 바란다.
원문: 박진우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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