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슬램덩크가 단순히 성공 서사가 아니라 치유 서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어서 아닌가 싶다. 언뜻 보면 우승, 승리, 성공을 목표로 하는 전형적인 성공 서사 같지만 인물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성공보다는 개개인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정대만이 울면서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폭력배가 되었지만, 사실은 농구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억눌려 왔다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어릴 때는 그 장면이 마냥 좋았지 왜 좋은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 다들 강한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순수한 소년이나 소녀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어릴 적에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애써 아닌 척하고 모르는 척하고 강한 척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은 그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강백호가 채소연으로부터 첫 마디를 들었던 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마찬가지로 불량배에 불과했던 강백호는, 그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무언가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여느 소년 만화처럼 농구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에 농구를 택했다.
2.
이번 극장판은 송태섭의 치유 서사를 다루어서 좋았다. 가족의 죽음, 어머니의 절망 가운데에서 자기가 의지할 것이라곤 오직 농구밖에 없는 그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다. 어린 소년은 농구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약이나 술·담배에 빠져 인생을 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태섭은 농구에 절실하리만치 몰두하며 그 시간을 이겨낸다. 절실한 몰입이야말로 인생이고, 또 치유의 전부나 다름 없다.
대개 이런 치유 서사는 로맨스물에서 다루어진다. 상처 입은 주인공은 연인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고, 결국 세상을 이겨낸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연인의 자리를 ‘농구’로 치환한다.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던 소년은 농구로 삶을 치유받는, 농구로 한 시절을 견뎌내는, 농구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누구나 그렇게 절실한 의존이 필요할 때가 있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치유하는 것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서로다. 이들은 한 팀을 이루어 서로를 지탱하며 손을 붙잡아 준다. 상처 입은 꿀벌들처럼 모여서 팀을 이루고,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해주면서, 스스로와 서로를 치유해 나간다. 그들에게는 농구가 너무나도 필요했는데, 꼭 1등이 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을 삶에 붙잡아 주는 유일한 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3.
개인적으로 슬램덩크에는 기억나는 장면이 정말 많지만, 패배 후 낚시를 하는 윤대협과 가업인 식당을 물려받은 변덕규에 대한 장면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절 청춘에 스쳐 지나간 농구, 혹은 연인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그 시절,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여 매일 동아리방에 찾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밤마다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슬램덩크〉의 소년들은 농구가 전부인 한 시절을 살아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치유했고, 삶이 되어 주었고, 그들을 온전히 살게 했다.
사람에게는 몰입할 것, 삶의 의미를 주는 것,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에서 맡을 역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농구부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떤 청소년기를 보내서 어떤 청년이 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더 외롭고 절망적인 시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구를 좋아했다. 그랬기에 ‘영광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다음 삶으로 갈 수 있었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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