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은 많이 벌어도 계속 부족해진다. 대개 우리는 현재 소비수준에서 돈을 더 많이 벌었을 때의 여유를 생각하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그만큼의 소비수준이 형성된다. 돈은 언제나 쓰임이 있기 때문에 많으면 많은 대로 더 많은 쓰임을 찾게 된다.
이를테면 월 3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절제할 건 절제하고 쓸 때는 쓰면서 100만 원 정도를 저축한다고 해보자. 이 중 100만 원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거나 혹시 모를 위험을 위한 대비책으로서의 자금이다. 갑자기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은퇴 이후도 준비해야 하므로 ‘필수적인’ 금액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이 사람에게 매달 100만 원이 더 생긴다고 해보자. 그는 저축이나 보험, 투자를 100만 원 더 늘려 안정적인 미래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소비를 해보기 시작할 수 있다. 몇 년만에 겨울 코트를 바꾸고, 차를 사거나, 공연에서 S석 대신 R석에 앉아볼 수 있다. 이코노미 대신 비지니스석을 타볼 수 있고, 아이 학원을 하나 더 보낼 수 있고, 부모님 용돈을 드릴 수도 있다. 굳이 사치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소비수준이 조금씩 늘어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면 벌수록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그만큼 쓸 곳들이 적극적으로 늘어난다. 늘어난 쓰임새 때문에라도 돈 벌기를 그만둘 수 없다. 오히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버는 길을 계속 택하게 된다.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사이클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밤낮없이 주말에도 일하면서 정말 많은 돈을 버는데, 대개는 그만큼의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다. 수십억대 부동산이나 사업체의 빚을 갚고 있거나, 자녀 교육비나 유학비로 월에 수백만 원을 쓰고 있거나, 억대 자동차의 할부를 갚고 있는 식이다.
인간은 무언가가 ‘가능’할 때 그 가능성으로 뛰어드는 걸 좀처럼 참을 수 없다. 5억이 있으면 10억대 아파트를, 10억이 있으면 20억대 아파트를 사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그렇게 점점 더 큰 눈덩이를 굴리는 삶으로 들어선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버는 사람들도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엄살이나 기만은 아닌 셈이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이클을 적정한 시점에서 멈출 필요도 있다. 돈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일도 때론 필요한 것이다. 돈은 계속 쓰이고 싶어 하지만, 쓰면 쓸수록 우리는 욕망의 연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 돈의 흐름에 차단기를 내릴 필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사랑은 돈으로 환원될 수 없다. 가족과 함께 공원에 나가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하며 뛰어노는 일은 오로지 그 시간으로만 얻을 수 있다. 운동이나 글쓰기도 돈으로 사는 것보다는 시간의 축적이 더 중요하다.
책을 읽는 일에 푹 빠지는 데도 큰 소비가 필요 없다. 그런 것들로 삶을 채울수록 돈이 불러일으키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에 어느 정도 차단벽을 내릴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어디까지 자신을 굴려야 하고, 어디쯤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돈을 벌거나 쓰는 일과 무관한 어떤 영역을 형성하면서 말이다.
언젠가 수억 원대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자신은 아이가 크는 걸 ‘길이’로만 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밤늦게 집에 와서 잠든 아이의 키가 커 있는 모습으로만 아이의 성장을 측정한다는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큰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주말마다 아이와 함께할 수 있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는 언젠가 수억 원대의 연봉을 제안한 직장에서의 제안을 거절했다.
삶은 그 양자 사이의 어디쯤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 누구든 확실히 ‘선택’해야만 하는 종류의 문제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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