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다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다니다 좋은 글을 보았다. 장 뒤뷔페가 지은 『아웃사이더 아트』(장윤선 역, 다빈치, 2003)라는 저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집주인이 회상하는, 죽을 때까지 고독한 삶을 살았던 남자
나는 거의 20년 동안 헨리 다거를 보아 왔다. 헨리 다거는 내가 세놓은 집에서 살았다. 다리를 끌면서 걷는 이 늙은 남자는 매우 내성적이어서, 가끔 찾아오는 성당의 신부를 제외하고는 그의 방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932년에 큰 방 하나를 빌린 다거는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방은 그가 모은 잡동사니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산책을 나가, 집에서 꽤 먼 곳까지 가서 자신만의 보물을 찾기 위해 지팡이로 쓰레기를 뒤지곤 했다. 십자가, 부서진 완구, 오래된 잡지, 깨진 렌즈를 테이프로 붙인 안경 몇 개, 빈 펩토 비스몰 약병(위통에 쓰이는 물약), 토막실을 이어 만든 털실 뭉치 몇백 개… 컬렉션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다거는 아침 식사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방에서 나왔다. 여름에는 어깨 부분이 다 떨어진 민소매 셔츠를 입고, 바지 벨트 대신 낡은 신발 끈으로 동여맸다. 주머니에는 항상 더러운 지갑이 들어 있었다.
겨울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군용 코트와 귀마개가 달린 어부용 모자를 쓰고 다녔다. 때로는 산산이 부서진 렌즈를 반창고로 붙여서 몇 주 동안 쓰기도 했다.
다거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면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언제나 한 가지, 날씨에 관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내면이 파괴적 힘을 가진 기상 현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없었다.
다거는 성대모사를 잘했다. 어찌나 잘하는지, 혼자 방에 있음에도 생생한 말다툼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주로 다거의 쉬고 낮은 목소리와 그가 잡역을 하는 병원에서 감시의 임무를 맡고 있는 빠르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생소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자신을 브라질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니 포르투갈어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하루는 병원에서 일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당했다. 간신히 계단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자, 다거는 나에게 카톨릭 노인 요양 시설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인가 그가 있는 시설에 위문을 갔다. 그때마다 그는 번쩍번쩍 윤이 나는 청결한 타일과 TV, 수다스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웅크린 채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주변과는 완전히 격리되어 어떤 위협이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의 면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보려 하지도 않았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다거는 그의 인생을 자신의 2층 방에 두고 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몇 개월 후에 사망했다.
다거의 방에 숨겨진 것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가 만들어낸 경이적인 세계를 알지 못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다. 헨리 다거의 죽음 뒤에야 나는 다리를 끌며 걷던 늙은 남자가 정말 누구였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 네이선 레너(사진가)
네이선 레너는 다거가 살던 공동 주택의 주인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 소속의 사진작가이자 예술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거가 방에 남긴 『비현실의 왕국에서』의 미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그의 방과 유품을 사후 보존했다.
헨리 다거(Henry Darger, 1896~1973)의 일생
그는 1892년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4살도 되지 않아 여동생을 낳다가 사망했다. 아버지가 그를 키웠으나, 7살이 되어 병에 걸리자 헨리 다거를 가톨릭학교에 맡겼다. 이후 지적 장애가 있다고 오진받은 다거는 지적 장애아를 위한 시설로 보내져, 수년 간 아동 학대와 방임에 노출되었다.
1909년, 그는 때마침 불어닥친 토네이도를 틈타 시설을 빠져나왔다. 그는 시카고의 대모 집에 숨었다. 이후 대모는 다거에게 한 가톨릭 병원의 수위 일자리를 찾아 주었으며, 다거는 평생 그 일을 했다.
그는 청소나 설거지, 붕대 처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932년부터는 1973년까지 공동주택의 방 한 칸에서 생활했다(위에서 소개한 네이선의 집이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면서 하루에 5번 미사에 참여했다. 인형과 종교적 성상, 성인들의 그림, 노끈 뭉치, 잡지와 만화를 수집했다. 가끔 찾아오는 근처 성당의 신부를 제외하면 아무도 오지 않는 절대 고독의 공간이었다.
네이선 레너는 다거가 죽은 뒤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갔고, 거기에서 엄청난 양의 원고 더미를 발견했다. 그것은 『비현실 왕국의 비비안 걸스의 이야기 혹은 어린이 노예의 반란으로 인한 글랜디코 vs. 안젤리안 전쟁 폭풍 이야기』라는 긴 제목의 공상 소설이었다. 타자기로 쳐서 손으로 제본한 책이 7권, 손으로 쓴 원고가 8권으로 전체 15,145페이지에 달했고, 이야기를 설명하는 삽화도 수백 장에 달했다. 어떤 책이길래 순식간에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것일까?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Unreal)
그가 쓴 『비현실의 왕국에서』는 총 15권, 15,145페이지의 문학사상 최장 논픽션 판타지 소설로 꼽힌다. 헨리 다거의 서사시적인 아름다움과 기묘한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글과 그림을 싣고 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글랜델리아 왕국의 두목은 존 맨리는 애비엔에 사는 모든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그러자 사랑스러운 일곱 명의 자매 ‘비비안 걸즈’가 반란의 선두에 선다. 이 소녀들은 잔혹한 남자 어른을 상대로 용맹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때로는 야만적 행위의 희생물이 되기도 한다. 모든 모험은 거대한 행성 위에서 전개된다.
다거가 직접 그린 화집만 3권이 넘는다. 수백 장의 그림 가운데에는 길이가 3미터가 넘는 것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신문이나 어린이용 도안책, <리틀 애니〉를 비롯한 만화 주인공을 먹지에 대고 베꼈다. 그리고 연필로 세부를 수정하여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나 요정으로 바꾸는 작업을 반복했다.
큰 이미지가 필요하면 동네 가게에 가서 이미지를 확대했다. 같은 이미지를 여러 곳에 수차례 사용했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소녀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소녀들은 불타오르는 숲속을 질주하고, 쫓아온 병사들의 칼에 찔리며, 감옥에 갇혀 복수를 당한다. 이는 롤리타 버전으로 만든 단테의 <신곡>이고, 사도마조히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끝없는 대살육의 이야기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세상이나 인생 속의 악이나 부조리에 무심한 신에게 분노해 있었다. 그래서 신을 단념한 채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해결책을 구했다. 그래서 그의 망상은 동화의 환상성과 카톨릭의 독실한 신앙, 잔혹 행위에 대한 극명한 묘사가 혼재하는 독특한 표현으로 분출되었다.
혹자는 그의 그림이 소녀에 대한 왜곡된 열망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아동 성도착이나 기타 심각한 폭력 성향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어린 시절 학대를 당했고 생애에서 거의 모든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살았다는 점 등을 감안했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공포를 문학 작품으로 표현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야기 속에 직접 등장하는 헨리 다거는 종군 기자가 되어 아이들이 처한 잔인한 현실을 고발한다. 소설 속 소녀는 절규하듯 외친다.
너희는 나쁜 놈들이야. 너는 내 오빠와 언니를 오래전에 죽였어. 그리고 지금은 내 소중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찾고 있지. 그러나 넌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네가 부리는 장교들이 그들을 죽였어.
헨리 다거는 오늘날 ‘아르 브뤼(Art Brut)’ 또는 ‘아웃사이더 아트’로 불리는 아티스트 중 가장 유명하다. 예술가 장 뒤뷔페가 착안한 개념인 ‘아웃사이더 아트’는 스스로의 세계가 확고하고 자폐적인 경향을 띠는 제도권 바깥의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을 이르는 말이다. 헨리 다거의 작품과 그의 방 모습은 아웃사이더 아트 예술가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웹사이트 ‘INTUIT‘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 헨리 다거는 일리노이주의 올 세인츠 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아이들의 보호자’라는 수사가 붙어 있다.
원문: 노모뎀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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