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환경 속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물성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찰하는 사람이 꼭 사교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성긴 인간관계의 틀이 거리와 골목을 기웃거리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관찰하게 해 주는 측면도 있다.
비비안 마이어(VIvian Maier)가 그러했듯, 내향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자신을 촘촘히 통과한 기록과 이야기들을 내보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왜곡하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는 일이 괴로워 층층이 쌓아 다락방 구석에 방치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Finding Vivian Maier)>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이름으로 수십만 장의 필름 사진을 남기고 죽은 여인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으로 시작한다.
왜 그녀는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고도 단 한 명의 타인에게도 그것들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을까?
영화는 그녀를 알던 사람들의 기억을 인터뷰하며, 비비안 마이어라는 미스터리 투성이 인간의 총체에 다가서려 애쓴다. 그녀를 겪어본 다양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영어 단어로 그녀에 대한 단서를 던져준다.
paradoxical(역설적), bold(대담한), mysterious(신비한), eccentric(기이한), unusual(특이한), private(사적인), loner(외톨이), curiosity(호기심)……
그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저 단어들 대부분은 그녀가 찍은 수많은 사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하지만 단 하나, 그녀 또는 그녀의 삶에 쓰인 적이 없는 단 하나의 단어가 사진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조용히 발화된다, ‘beautiful’이라고.
380달러로 구매한 상자에 담겨 있던 필름들
2007년 겨울, 시카고에 대한 역사책을 준비 중이던 영화의 감독 존 말루프(John Maloof)는 과거의 사진 자료들이 필요했다. 그는 집 앞 경매장에서 비비안 마이어라는 무명 사진작가의 이름으로 나온 대량의 필름과 현상된 사진을 380달러에 구매한다. 쓸모를 찾지 못해 2년 가까이 방치해두다가, 우연한 계기로 사진들을 다시 꺼내 든 그는 그녀의 사진 몇 장을 골라 스캔한 후, 자신의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사진을 감상한 사람들로부터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지자, 존 말루프는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 사진을 수소문해 추가로 구매한다. 무명의 작가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며칠 전에 올라온 한 줄의 부고 기사를 인터넷에서 확인하게 된다.
Vivian Maier died peacefully.
감독은 비비안 마이어의 유품을 챙기러 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유모 일을 하며 홀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 미스터리한 여인의 삶을 추적하고, 그녀의 사진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 첫 프로젝트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손수 인화하고 인쇄해서 시카고 문화센터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전시회장에는 연일 구름떼 같은 관객들이 찾아와 그녀의 사진을 감상하고 감동한다. 언론 매체는 호들갑스럽게 미스터리한 무명 사진작가의 센세이션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비비안 마이어를 유모로 고용했던 가족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정부 문서 보관소에서 그녀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단서를 추적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영화는 조금씩 그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드러낸다.
홀로 살았던 미스터리한 유모의 삶은
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출신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유년기에는 프랑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헤어져 어떤 교류도 없이 살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이 철저히 1인분만의 삶을 산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 자유가 확보되고 숙식도 제공되는 유모 일을 50년대부터 시작해 평생의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틈틈이 그녀는 목에 카메라를 걸고 시카고 곳곳을 배회하며 인물들의 사진을 찍는다. 예쁘고 화려한 사진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표정과 몸짓이 담긴 사진들이다. 계급과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찰나의 고유한 질감과 일생의 단면을 사진에 담는다. 낯익은 거리의 낯선 순간, 그 찰나를 프레임에 담아내는 사진작가로서 그녀가 가진 깊이와 통찰력은 평론가들조차 감탄케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질문.
도대체 그녀는 왜 그토록 방대한 양의 사진을 찍고도 홀로 간직했는가? 생의 비애와 고단함, 환희와 따뜻함이 교차하는 사진들을 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
영화의 대부분은 비비안 마이어를 유모로 고용했거나 그녀가 돌봐 왔던 사람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다. 그녀는 병적으로 물건을 모았고, 자신의 공간을 외부에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으며, 비사교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공통된 의견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술은 조금씩 결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난폭하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아이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직업적 자부심이 가득했던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이름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언어적 유희를 즐겼던 괴짜로 기억하기도 한다. 그녀와 비교적 가깝게 지냈다고 고백한 한 여성은 그녀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갈망했던 평범한 여자였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녀는 사진뿐 아니라 영상 필름과 인터뷰 등을 통해 하층민의 삶을 기록하고, 정치·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이는 그녀가 세상을 혼자 떠도는 섬으로 살아갔으리라는 감독의 예상을 비껴간 것이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유모 일을 잠시 중단하고 세계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마을 주민들과 자연 풍경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순간 영화는 지속해 왔던 질문에서 과격하게 방향을 튼다.
비비안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 마을의 사진관 주인에게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좋은 사진들이 굉장히 많아요. 무광택으로 인쇄를 부탁해요.
비비안 마이어는 결코 자신이 찍은 작품의 가치를 외면하거나 두려워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단지 그녀는 주저했을 뿐이다.
진실의 순간이 빛을 보이는 순간
영화의 후반부로 들어서면, 영화 내내 촘촘히 쌓아 올린 비비안 마이어라는 인간에 대한 서사의 조각들이 어떤 진실의 순간과 맞닿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순간이었을지언정 비비안 마이어가 소통에 대한 욕망을 내비쳤던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보네 앙 샹소르에서 그녀의 전시회가 개최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전시회에 들른다. 그들은 몇십 년 전 우연히 그녀의 프레임에 들어왔다 사라져 간 사람들,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흔적을 비비안 마이어의 흑백 사진 속에서 되짚으며 울고 웃는다.
세상의 난폭함과 불편함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알려준 부모, 물건을 버리지 못해 바닥이 휘어지도록 쌓아두는 저장 강박증 환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를 갈구하던 외로운 어른… 이 모든 단서는 그녀라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조각일 뿐이다. 조각은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한 인간의 총체를 온전히 보여줄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가치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함이 혹시 존재한다면, 그것은 조각 속에 담긴 찰나의 진실을 함께 바라보고 공감하려는 진심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순간의 진실을 포착하며 거리를 떠돌았던 비비안 마이어. 그녀는 자신이 스쳐 지나갔던 우연과, 우연이 가닿을 영원의 길을 걸어 뚜벅뚜벅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원문: 청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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