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문학이 뭐예요? 순문학과 무슨 차이죠?
1학년들은 꼭 한 번씩 물어봐요. 일단 용어가 적확한지부터 고민해야겠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흔히 말하는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기준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장르문학과 순문학에 대해서는 훌륭한 이론가들이 이미 많이 이야기했어요.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싶으면 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차라리 장르문학비평서 같은 걸 보는 게 좋을 거예요. 비평가, 이론가, 학자, 현재 활동하고 있는 현직 작가님들의 책과 논문, 담론, 기고문들을 읽어보세요.
그런데 학문적인 정의 말고, 제가 왜 때로는 장르문학을 좋아하고 때로는 순문학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건 학문적으로 비교 분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제가 왜 장르문학을 쓰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지, 왜 순문학도 여전히 계속 읽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거예요.
현실: 앞도 뒤도 없고 개연성도 보이지 않는
제 생각에 현실은 시궁창이에요. 진짜요. 농담이 아니에요. 여러분들, 웹소설 읽다보면 댓글로 스토리의 개연성을 따지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개연성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일어날 법한, 있음직한 걸 말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봐도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 나와요. 그런데 작가는 ‘이건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 일입니다’라고 말해요. 그러면 개연성이 갖춰진 것일까요? 실제로 있던 일이니까? 있을 법 하다는 걸 넘어서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잖아요.
아뇨, 개연성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럴싸하다는 말은 ‘작품에 설정한 어떤 룰, 범위, 한정된 세계관 안에서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벌어질 법하다는 뜻이거든요. 창작물 속에서의 모든 사건은 큰 틀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에요.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원래 이 모양이에요. 우리는 모든 사건을 원인과 결과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필연적 흐름으로 생각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우리가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이에요.
이 능력 때문에 우리는 선택에 대한 불안을 더 크게 느끼죠.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분기점에서부터 전혀 다른 사건들이 펼쳐지는 망상도 가능하죠. 모든 사건은 도미노처럼 앞 사건이 뒤 사건의 원인이 되고, 뒤 사건은 앞 사건의 결과가 되어 흘러간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건은 서로의 유일한 원인과 결과가 되어 한 줄로 흘러가요. 이것이 개연성이라는 감각이에요.
실제의 작법도 그래요. ‘계기적 사건’ 지점에서는 뭔가가 우연하게 나타나도 돼요. 그런데 그로 인해 뭔가 하기로 결심했다면, 즉 플롯 포인트의 첫 번째 지점을 지나쳤다면 다시는 이 선택을 무를 수 없어요. 그러면 사건은 도미노처럼 흘러가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이 흐름을 타며 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되죠. 이게 우리가 배우는 작법이에요.
근데요, 현실을 한 번 볼게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어요. 정말로 말 그대로 시궁창이에요. 아무 일이나 벌어진다고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냥 벌어질 뿐인데 납득될 이유는 전혀 없어요. 원인 없이 해프닝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실성은 개연성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란 뜻이죠.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만수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어요. 그 사람이 착해서일까요? 여러분이 오는 길에 누가 던진 쓰레기에 맞았어요. 여러분이 나쁜 생각을 해서 벌을 받은 걸까요? 아니죠.
그런데 이렇게 작은 일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국가적으로 너무 큰 재난이나 너무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면요,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유를 찾아요. 스스로 자꾸 되묻게 되는 거죠.
내가 원래 복도 없고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이런 일이 생겼나? 아니, 저렇게 큰 사고가 왜 나는 거지? 그럴 리가 없어. 저건 분명히 무슨 음모가 있어. 혹시 제물로 바친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왜 생기겠어요? 말이 안 되거든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요. 자연재해 때문에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대. 그럴 리가 없어. 평범하게 내일 아침 학교 갈 일 생각하고 대출금 갚을 생각하고 오는 길에 떡볶이 먹을 생각을 하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삶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리가 없어. 여러분, 저건 하나님을 안 믿는 나라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또 ‘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잖아요.
하지만 현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벌어진다고요. 개연성 같은 건 없어요. 우린 지뢰와 선물이 깔려 있는 벌판을 안전한 농장이라고 착각하고 배회하는 한 무리의 개떼 같아요. 누구도 이 현실을 통제할 수 없어요.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선물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세계관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에요.
누가 설정해 준 세계관, 그런 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지뢰와 선물이 묻힌 규칙, 그런 의도를 가진 규칙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신이 어떤 의지로 세계관을 설정했다면 그에 따라 살면 지뢰도 피하고 선물을 받겠죠. 호모 사피엔스들은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납득을 하니까 이 시궁창 같은 세계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신이 어떤 설정을 했을 거라고 믿고, 뭔가 시궁창 같은 일이 벌어지면 신의 뜻을 알아내려고 아우성을 쳤단 말이에요. 출제 의도를 알아내려고요.
하지만 누가 세계관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고요. 출제자가 없어요. 적어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디테일한 설정을 한 신은 없다고요. 그게 현실이죠.
장르문학: 불안한 우리를 잠재우는 아름다운 설계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제가 왜 장르문학을 좋아할까요? 장르문학은 룰이 있어요. 작가가 룰을, 범주를, 범위를, 한계를, 세계관을 만들었잖아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뢰처럼 터지지 않고 도미노처럼 일어나잖아요.
마지막 도미노가 쓰러진 이유는,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졌기 때문이잖아요. 1막에 권총이 나오면 3막에는 발사되잖아요. 우리는 그 도미노가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하게 정신을 빼놓으면서 넘어갈지 설계할 수 있어요. 드디어 마지막 도미노가 넘어갈 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어요. 중간에 몇 번이나 위험했지만, 결국 마지막 도미노가 넘어갈 건 알고 있어요.
권선징악의 세계관에서는 착한 사람이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해요.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신앙심 깊은 기사들이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쳐요. 연인들은 방해를 뛰어넘어요. 영웅은 관문을 통과하고 세상을 구해요. 젊고 가난해도 능력이 있으면 성공하고요. 치사한 빌런은 정당하게 노력한 주인공에게 결국은 무릎을 꿇어요. 금기라고 설정된 룰을 어기면 호러적 처벌을 받고요. 협이 있는 무도가가 무림을 바로잡고, 탐정은 미스터리를 해결하죠.
장르문학은, 이 불확실한 세계, 그냥 실존밖에 없는 세계 속에서 불안에 빠진 우리를 위로하는 아름다운 설계예요. 이야기와 캐릭터가 있는 명확한 디자인이고 견고한 아키텍처예요. 장르문학의 클리셰가 유치해요? 그까짓 클리셰 좀 따르는 게 왜 문제예요? 장르마다 내용이 다 비슷비슷한 거? 그 비슷비슷한 문법이 우리를 안도시키는 거라고요.
순문학: 문자로 있는 그대로 빚어낸 현실
반면 순문학은 시궁창 같은 현실, 그것 자체를 보여주려고 해요. 현실을 뚝 잘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을 눈앞에 들이밀면서 똑바로 보라고, 이 불편함을 외면하지 말라고, 바로 이게 현실이라고. 그래서 불편함을 일부러 유발해요. 현실을 고치고 싶으면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하고, 도발적으로 내 멱살을 잡기도 하죠. 나를 탓하기도 하고, 나에게 애걸하기도 하고, 나를 비웃기도 해요.
이런 시궁창 현실에 진짜 현실적인 인간을 던져놓고 관찰하기도 해요. 개연성 없고 예측 안 되고 일관성 없는, ‘진짜 나’ 같은 인간들을 던져놓는 거죠. 그리고는 인간의 약한 점과 악한 점과 장한 점과 애잔한 점을 관찰해요.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밉기도 한 인간의 레이어를 일일이 벗겨내며 관찰하죠. 인간의 아름다움을 찾기도 하고, 더러움을 찾기도 해요. 현실도 복잡해 죽겠는데, 이걸 보면 더 복잡해져요.
우리는 보게 돼요. 내가 외면해 왔던 불편함을 다시금 직시하게 되기도 하고, 분노와 슬픔, 구차한 사랑과 연민, 구역질을 느끼기도 하죠. 선도 악도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깨닫고, 내가 바로 그 인간이라는 것도 깨닫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죠.
마무리하며
이것들이 제가 웹소설을 포함한 장르문학을 사랑하고 계속 쓰는 이유고, 순문학도 계속 읽는 이유예요. 그래서 특정 조건 하에서는 서로 교차하거나 섞을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되실 거예요. 반대로 서로의 거리를 지키려는 이유도 짐작이 되실 거고요.
지금까지의 제 대답은 너무 개인적이어서, 여러분들이 찾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만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 두 문학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문: 칼리가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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