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2일, 에일리언의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H. R. 기거(Hans Rudolf “Ruedi” Giger)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로테스크하고 묵직한 이미지들을 좋아하던 저의 취향을 직격하던 작가라 더욱 충격이었죠.
기거는 1940년 2월 5일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에 있는 쿠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약사였고 집안 살림은 어렵지 않았지요. 기거가 아직 어렸던 시절의 어느 날, 기거의 아버지는 제약회사로부터 판촉물(?)이라고 인간의 두개골을 받아왔어요. 기거는 여기에 뿅 갑니다. 더 나아가 살바도르 달리와 장 콕토의 작품들에도 영감을 받아 그 특유의 어둡고 기괴한 취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운 좋게도 부모님은 이러한 아들의 취향을 응원해줍니다. 그래서 기거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을 초대해 자기 작품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하는 등, 긍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기거는 취리히의 응용미술학교에서 건축과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나가지요.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시작하던 1966년 부근, 그러니까 20살 중반부터 이미 우리가 익히 보아서 알고 있는 초기 작품들을 완성합니다. 그 후로 영화 관련 작업도 하게 되고요. 이렇게 기거는 초현실주의 화가,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크리처 디자이너, 세트 디자이너 등등으로 불릴만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1. 초기의 그림들
그럼 1960년대의 작품들, 기거가 20대일 때쯤의 초기작들을 보고 갑시다.
25살 때와 28살 때 쯤의 그림입니다. 초기에 기거는 잉크로 그림을 그렸죠. 단색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계속 비슷한 방식을 고수합니다. 이때 벌써 신체와 기계를 섞는 특유의 스타일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위는 초기작이면서도 특히 유명한 ‘출산 기계’라는 작품입니다. 자궁은 피스톨의 챔버로 표현되고, 태어날 아기들은 카트리지에 차곡차곡 장착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조각으로도 만들어져 있으니 한 번 이미지를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에어브러시의 마스터
한편 기거를 말하자면 에어브러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부터 기거는 에어브러시를 주로 사용하거든요. 에어브러시란 공기의 압력을 이용하여 염료를 분사하는 공기물감총 같은 것입니다. 특수 분장, 바디 페인팅, 자동차나 바이크의 도색에도 많이 사용됩니다.
락카를 생각하시면 돼요. 훨씬 세밀하지만요. 에어브러시에도 여러 종류와 여러 모델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펜 가까이에 작은 물감 캔이 달려있고, 아래 쪽으론 긴 호스가 달려 있어 압축 공기통과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에어브러시는 팁이 종이 표면에 직접 닿지 않기 때문에, 가운데는 진하게 뿌려지고 가장자리로 갈 수록 물감이 덜 뿌려져서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이 형성되죠. 작은 점 하나를 찍어도 엣지가 날카롭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덩어리감과 공기 원근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 에어브러시가 사진 조작의 핵심 기술이기도 했답니다. 스탈린 옆의 Yezhov가 사라진다거나…
여튼, 지금 중요한 건 에어브러시의 원리가 아니라, 기거의 주요 작품들이 거의 에어브러시로 그려졌다는 것이죠.
돌연변이라는 제목의 위 작품은 원래 1968년에 그려졌습니다만 미완성이었다가 1975년에 에어브러시로 완성됩니다. 위 그림들과 비교하여 에어브러시의 그라데이션이 만들어내는 공기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공기원근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이 확 오죠? 먼 풍경에 공기가 중첩되어 뿌옇게 보이는 효과라던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안개에 싸인 분위기라던지. 이전의 그림들처럼 이미지가 캔버스 표면에 달라붙은 느낌이 아니죠.
3. 작품세계
기거 작품 세계의 핵심이자 반복되는 소재는 바이오메카노이드(biomechanoid)라는 합성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초현실적이고 음울한 환상 속 세계, 불안이 스며들어 있는 왜곡된 형체, 그리고 신체와 기계가 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스타일이죠.
휴머노이드도 비교적 유명하진 않지만 분명 걸작입니다. 복잡하고 꼬여있는 디테일들은 없지만 더 심플하고 단단하게 그려져 있어요.
LI는 여성의 곡선과, 기계 파이프의 곡선을 연결시킨 기거적인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성 신체와 기계를 이만큼 매력적으로 결합할 수 있던 작가는 기거가 최초일 겁니다. 신체에 대한 폭력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아름답죠. 그런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네크로놈 V도 들 수 있습니다.
4. 에일리언과 네크로노미콘
이제 여러분이 언제 말하나 기다리셨을 에일리언 얘기를 해봅시다. 아시다시피 기거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일리언(1979)에 참여했습니다. 그 전까지 기거는 그렇게까지 거장 취급을 받는 아티스트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 커리어 덕분에 기거의 외계인 크리쳐 전설이 시작됩니다.
리들리 스콧이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진 책이 기거의 첫 출판물인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이었어요. 네크로노미콘에는 네크로놈 IV라는 이름의 다음과 같은 크리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봐도 귀두 괴물 같지만 에일리언과의 연관성이 보이시죠? 이 얘기를 좀 더 덕후스럽게 하자면 H.P 러브크래프트를 짚고 넘어가야 해요. 왜 갑자기 러브크래프트냐고요? 러브크래프트의 1924년도 작품 “더 하운드(The Hound)”에 처음 언급된 후로, 크툴루 신화에 전반에 등장하는 마도서가 바로 네크로노미콘이거든요. 읽는 사람은 끔살당한다는 바로 그 책…!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여튼 그러다보니 러브크래프트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네크로노미콘”을 자기 작품 속에 언급하거나 제목으로 삼거나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기거 역시 러브크래프트를 읽었죠. 그래서 기거의 작품집 이름이 “네크로노미콘”이 된 겁니다. 한국에서 이랬다면 나잇살이나 먹은 양반이 중2병이라며 수근수근댔겠지만. 기거 버전의 네크로노미콘에 수록된 그림들을 모두 보았지만 다행히 전 아직까지 끔살당하진 않았어요.
5. 그 외 영화관련 작품들
기거는 1985년의 저예산 영화인 로널드 W. 무어의 퓨처 킬(Future Kill)이란 영화의 포스터도 제작합니다. 그리고 데이빗 핀처의 에일리언 3(1992)에서도 개 같은 모양의 에일리언 크리처를 작업하죠.
그 외에 여러 작업을 합니다만 스피시즈(1995)에서 여성형 외계 크리처인 ‘씰’이 너무나 기거적이라서 꼽고 싶네요. 스피시즈의 감독인 로저 도널드슨도 기거의 “네크로노미콘”을 보고 스위스로 날아갔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동시에 우아하고 섹시한 씰을 볼 수 있었죠.
멋져! 섹시해! 정말 초 섹시해! 케리건 느낌이지 않냐능. 기거는 많은 외계인 크리처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참고로 영화에선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인간 남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평소엔 인간 미녀로 다니다가 남자를 꼬셔서 수정에 성공한 뒤 죽임…
6. 뮤지션과의 작업
73년에는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라는 영국 프로그레시브 그룹의 브레인 샐러드 서저리(Brain Salad Surgery)라는 앨범 커버를 작업했습니다. 앨범 겉표지를 열면 여성의 얼굴 전체가 나오는 방식이었죠.
스위스 익스트림 메탈 밴드인 켈틱 프로스트(Celtic Frost)의 1985년 앨범인 투 메가 테리온(To Mega Therion)에도 기거의 작품이 사용되었습니다. 유럽인은 참 거침 없네요.
히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뮤지션입니다. 1994년 앨범인 히데 유어 페이스(Hide Your Face)에도 특히 좋아했던 곡들이 있었죠. 다이스(DICE)라든가, 다우트(DOUBT), 텔 미(TELL ME), 그리고 50% & 50%란 곡이었죠. 그런데 이 앨범 디자인을 봅시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죠? 히데는 기거의 93년도 작품인 “와치가디언, 헤드 V(Watchguardian, head V)”를 마음에 들어했지요. 그 작품에다 자신의 눈을 합성해서 앨범 자켓으로 사용하고 싶었대요. 원칙적으로 자신의 작품 변형을 허용하지 않던 기거였지만 놀랍게도 히데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이런 건 드문 경우라고 합니다.
실제로 기거의 작품인 “와치가디언, 헤드 V”입니다. 무시무시하죠. 철가면 같기도 하고요. 멋있어요. 히데는 역시 비주얼적 미감도 뛰어났군요. 갑자기 히데 칭찬
앨범 아트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작품은 “페니스 랜드스케이프(Penis Landscape)”입니다. 이걸 올려도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어서 고민이 좀 되지만… 으으 한국의 검열이 내 스스로를 옭아맨다.
여튼 기거의 “페니스 랜드스케이프”는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란 하드코어 펑크 밴드의 1985년도 앨범 프랑켄크라이스트(Frankenchris) 재킷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만 외설 소송이 걸리는 바람에 그들의 레이블인 얼터너티브 텐타클 레코드(Alternative Tentacles Records)가 파산할 지경이었지요. 이 작품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게 맡기겠습니다.
전 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차별적인 요소라던가 비하적인 요소라고 생각될 만한 것도 없고, 그저 기거가 원래 하던대로 건조한 눈으로 신체의 일부 지점을 기계적으로 채취해서 결합한 것뿐인 걸요. 게다가 성적인 행위를 암시한다고 해도 이걸 음란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성적 고양감을 유도하려는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7. 게임
기거는 게임에도 참여했어요. 사이버드림사의 다크 시드(Dark Seed)와 다크 시드 2의 콘셉트 아트였죠. 보세요, 뭔가 낯익은 여자가 나오죠? 다크 시드를 플레이했던 사람들은 이런 초현실적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8. 기거 바
마지막으로 기거 바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기거의 디자인이 듬뿍 적용되어 있는 쿨한 공간입니다. 스위스에 두 개의 기거 바가 있고 뉴욕은 없어졌다고 하네요. 슬프게도 기거는 이제 외계로 돌아가고 없지만, 언젠가 스위스에 갈 수 있다면 꼭 기거 바에서 술을 마셔보고 싶습니다.
제가 운이 좋다면, 이 자리에 앉아서 헤비메탈을 들을 날이 오겠지요.
원문: mediafish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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