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이 현대미술에 느끼는 당혹감
지금이야 디지털아트, 미디어아트, 컴퓨터아트란 말이 흔하고 그것들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일반적으로는 무리가 없지만, 분명히 아직까지도 내심 거부감을 갖는 분들도 역시 존재합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대단하다지만 실제로 기대하고 봤을 때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아 곤란했던 경험도 있을 수 있고요.
이런 분들은 예술을 스탕달 신드롬이라도 일으킬 만한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니면 무척 아름답게 그리거나 연주하여서 감각적으로 무척 쾌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 감상’이라는 행위를 ‘감성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감성이 예민하면 예술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따라서 디지털아트 작품들을 보면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어떤 감성도 없어 보입니다. 시각적으로 황폐하죠. 이러한 ‘형상의 빈곤’은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디지털미디어 예술을 말하기 위해선 먼저 현대예술의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위는 보다 못해 지겨워지셨을 뒤샹의 〈샘(Fountain)〉입니다. 흔히 현대예술의 해체적이고 전복적인, 전위적인 특성 등등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날 이해시킬 수 없고 감동을 줄 수 없으면 예술이라고 볼 수 없어! 예술 감상은 주관적인 거잖아?’라고 심술을 내기 딱 좋은 예로 보입니다. ‘이딴 게 무슨 예술이야? 이런 게 예술이면 나도 하겠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죠.
하지만 본인이 직접 변기를 뜯어내고 사인은 할 수 있더라도, 뒤샹과는 달리 억울하게도 그것이 예술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가 심지어 뒤샹은 ‘앞으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화가이면서도요. 누가 봐도 잘 그렸다 싶은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말이죠. ‘그 양반이 그림은 잘 그리나?’, ‘그림이나 조각도 없이 말빨로만 예술을 하다니, 현대예술이란 건 쓰레기, 말 장난, 거대한 사기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했다고 하는 얘기가 있던데요,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현대예술에게 느끼는 당혹스럽고 적대적인 감정을 타당화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은 또한 이렇게 항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난 예술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알아!’
2. 예술은 더 이상 장식에 종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H.W. 잰슨, 『미술의 역사』, 삼성출판사, 1978, 17쪽). 이러한 작품에 심술을 내고 싶은 이유는
- 첫째, 아름답지 못하고
- 둘째, 어떻게 감상평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시대 조각이나 아름답게 그린 르네상스 회화는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 해도 한마디 할 수 있죠. ‘아름답다!’ 이것이면 충분하거든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Mona Lisa)〉를 봤을 때 ‘우아하다.’ ‘멋있다.’ ‘예쁘다.’ 등등 그 무엇을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느끼라고 그린 그림이니까요. 느낌에 대한 반전은 없습니다. 즉 보는 사람이 시각적으로 쾌적하라고 그린 그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각의 쾌적함을 표현한 평가들이 그대로 감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서 ‘스푸마토 기법으로 입매를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했기 때문에 미소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라거나 ‘뒷 배경을 먼 거리로 놓아서 거리감을 주었다’ 등의 말을 할 순 있겠지만 이것은 엄밀히 감상이라기보다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렸나’를 분석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뒤샹의 〈샘〉의 경우에는 멋있는 것도, 예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딱히 어떤 특별한 감성이 자아내지지가 않고, 나의 느낌이 곧 감상이 되지도 않습니다. ‘오래된 서양식 남자 변기군.’ ‘깨끗이 씻었겠지?’ ‘흰색이군.’ ‘사인한 글씨 못 썼네.’ 이런 것이 감상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떼어다가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인해서 출품한 것이 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고생했겠다.’ ‘아주 섬세하게 작업했네. 이 작가, 완전히 조각에는 숙달되었군.’ 등의 말로 숙련된 장인의 기술을 칭찬할 수조차 없습니다.
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카소의 〈황소 머리(bull’s head)〉는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주워다 서로 붙인 뒤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역시 어떠한 감상이 언뜻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창의성 어쩌고 하는 데에 등장하곤 합니다.
물론 아주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만, 여기에서의 독창성을 어떤 비슷한 형상을 보고 다른 형상을 떠올리는 것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면 곤란합니다. 자전거의 안장을 보고 황소의 머리를 떠올리는 것까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떼어내 갤러리에 출품하기까지의 생각의 전개에는 또 다른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 생각의 진보가 독창적인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미술은 시각적 쾌적함을 주는 것에 관심이 적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미술작품이 주는 감동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결국 아주 훌륭한 장식품의 연장선인 것입니다. 왕족이나 귀족이 예술품으로 집이나 정원을 장식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죠. 따라서 이때의 작가는 사실 ‘장인’ ‘기술자’의 연장선이 됩니다.
3. ‘예술’이라는 개념은 근현대에 들어 ‘발명’된 것
예술의 조건으로 ‘독창성’을 드는 잰슨은 예술가와 기술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술가는 기존의 규정에 저항하는 자세로 작업하고, 기술자는 기존의 기준과 질서를 존중하는 자세로 작업한다’(앞의 책, 17쪽)고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에서 보이는 캔버스 뒤로 마치 공간을 파낸 것처럼 보이는 선형 원근법이나 〈모나리자〉에서 보듯 스푸마토 기법을 표정에 적용한 발상은 당시에 분명히 독창적입니다. 하지만 원근법이나 스푸마토 같은 그러데이션 기법을 흔히 사용할 수 있는 현대에 그런 기법으로 비슷한 주제의 비슷한 모양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아무런 독창성도 없는 그냥 아름다운 장식품이겠죠.
사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없던, 그저 더 뛰어난 기술로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한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과거 작가들의 작품들을 뒤적여 예술이라는 제도로 채취하는 것도 근현대적 개념입니다.
이에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예술이란 개념은 근대적(지난 200년) 발명이며, 옛날에는 미술을 다루는 관습은 오늘날과 다르고, 제도 역시 대부분 존재하지 않았다고요.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가 지금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제도 속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맥락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박이소 옮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현실문화연구, 2006, 47~49쪽).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서양의 예술은 ‘신성함’ ‘아름다움’ ‘애국심’ 등을 주제로 그런 감정을 고취하려 했습니다. 신화나 종교적 사건들을 골라서 아름답게 재현했고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치 있는 소재로 평가했습니다.
4. 미술, ‘개념’을 받아들이다
이것은 사실주의 때 해체됩니다. 사실주의자들은 아름다운 가상을 그리기보다는 추한 현재의 사실을 폭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이어나간 인상주의 작가들 역시 당시의 흔히 보이는 소시민이나 사물, 풍경 등 의미 없이 휘발되는 것들을 그렸죠. 카페에서 지치고 우울한 표정을 지은 채 독한 압생트를 마시고 있는 여자를 그린 드가의 〈압생트를 마시는 여자(Le Buveur d’absinthe)〉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할 때 미래파는 움직임과 속도를 채취하려고 하거나, 아예 기계를 조각하고 그리기도 했습니다. 기계와 속도의 찬미. 에펠탑(Tour Eiffel)이 그 시대적 맥락에서의 작품이죠. 부드러운 표면 대신 난폭한 철골 구조물 그 자체를 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입체파는 2차원의 캔버스에 차원을 펼쳐 결국 형태를 해체합니다. 즉 미술에 ‘개념’이 도입된 것입니다.
‘예술은 장식품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가?’ ‘아무 의미 없이 휘발되는 현재는 소재가 될 수 없는가?’ ‘빛 자체를 순간적으로 채취할 수 있는가?’ ‘움직임을 그릴 수 있는가?’ ’3차원의 물체를 2차원의 캔버스에 펼쳐놓듯 해석할 수 있는가?’ 등등의 개념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은 보기에 쾌적한 것만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폐기했습니다. 이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4 minutes 33 seconds)〉처럼 ‘악기 이외의 소리, 관객의 소리는 음악이 아닌가?’ 등의 개념을 예로 들 수 있겠지요. 현대 시나 현대 연극은 어떻습니까? 난해하고 부조리합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이 된 것일까요. 감각적으로 쾌적할 필요도, 숙련된 장인의 손으로 남이 쉽게 흉내 내지 못할 기술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한 이상 예술은 다른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현대예술은 ‘개념’ 그 자체만 남은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제 철학자가 된 것이죠.
예전엔 철학자가 자신의 개념으로 예술을 비평했다면 이젠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으로 관념을 드러내는 철학자가 됐습니다. 현대예술은 개념, 관념, 철학을 하는 방법 그 자체인 것이지요.
5. ‘제도’의 합의를 통해 생산되는 현대예술
이렇게 표현된 개념들을 예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갤러리, 전시회, 공모전, 경매 등 모든 예술가와 예술품을 둘러싼 어떠한 예술 제도, 그것이 개념을 예술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뒤샹은 ‘예술은 제도다’라는 말을 했죠. 뒤샹의 〈샘〉도, 피카소의 〈황소 머리〉도 제도 안에서 예술인 것입니다. 〈샘〉 같은 경우에는 ‘예술은 제도다’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사인, 제도의 인정, ‘이거면 예술이 된다’는 예술에 대한 정의, 그 자체를요.
유명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Happy Tears)〉역시 만화도 제도에 들어오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죠. 만화를 도입하겠다는 발상이 독창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지점은 ‘만화를 도입하겠다는 발상’ 그 무형의 관념입니다.
다시 말해 현대예술은 그동안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예술가가 신 내림 같은 걸 받아 창조한다기보다 내적인 룰, 제도의 합의에 의해 생산됩니다. 제도는 그것이 비록 쓰레기 봉지라도 독창적인 개념이 도입되었다고 판단하면 예술로 인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도 사기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그것은 ‘난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를 예술이라고 내놨지롱~ 너흰 모두 속고 있다!’의 의미는 아니겠죠.
이 글의 결론을 말해봅시다. 현대예술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보거나 듣기에 쾌적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거슬리고 불편하기까지도 할 수도 있죠. 현대예술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관념을 질료로 삼은 예술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눈앞에 있는 어떤 당혹스러운 현대예술 작품에 표현된 놀라운 발상, 즉 작가가 말하려고 한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면 그는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답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념이 예술적이라고 감동할 수도 있을까요? 그 대답 역시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문: Media Fish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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