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GO〉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연애 이야기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웠고 외모도 일본인 같아 보이지만, 국적은 일본이 아닌 재일조선인이자 재일한국인에 관한 이야기. 〈GO〉는 고등학생 스기하라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건 본인의 연애 이야기라고.
재일조선인 스기하라는 조총련계 학교에서 주체사상과 노동 혁명의 역사 같은 북한식 교육을 받는다. 조선인 학교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를 사용한 친구를 서로 고발해야 하는 시간이 있고, 선생은 이 학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다.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한때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프로 복서였지만, 현재는 파친코 경품 교환소를 운영하며 조총련계의 중요한 자금줄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이 ‘재일조선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귀화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와이에 가야 하는데 재일조선인 신분으로는 자본주의의 온상인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국적을 바꾼다(※ 실제로는 재일조선인 신분으로도 해외여행의 제약이 크지 않았다고 한다).
스기하라 역시 허울뿐인 주체 사상만 주입시키는 학교를 빠져나온다. ‘민족의 반역자’ 소리까지 들으며 재일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꾼다. 그러나 일본인 학교로 전학을 간 첫날부터 재일한국인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주먹 좀 쓴다는 녀석들이 차례로 스기하라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하지만 프로 복서 출신인 아버지에게 배웠던 스기하라의 주먹질을 당해낼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코를 부러뜨려 준 녀석이 하필 야쿠자의 아들이어서 스기하라는 손가락을 잃을 뻔하지만, 코 수술을 한 후 인물이 훨씬 좋아진 아들을 보고 야쿠자 아버지가 만족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풀려난다.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친해진 친구 카토의 생일파티에서 스기하라는 사쿠라이를 만나게 되고, 둘의 ‘진짜’ 연애 이야기가 시작된다.
차별은 있지만 적은 어디에
국적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며, 그깟 국가의 이름으로 차별하는 인간들은 다 밟아주겠다며 큰소리치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스기하라는 사쿠라이가 자신의 ‘이정호’라는 이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다. 관계가 진전될수록 스기하라는 두려워진다.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시를 알려도 사쿠라이가 자신을 예전과 똑같이 받아줄지 자신이 없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차별은 증오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지만, 소중한 사람 앞에서는 움츠러든다.
〈GO〉는 2000년에 발표되어 일본의 유명 문학상 중 하나인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소설의 특징은 재일한국인 문제를 민족 간의 갈등이나 정치·역사적인 화합처럼 거시적인 담론처럼 끌고 가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나라 따위 가져본 적 없다고 말하는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이 겪는 연애와 우정의 이야기다. 이런 탈민족적인 관점이 이전 세대의 재일한국인 문학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소설에는 스기하라에게 같은 일본인 학교의 학생이 조용히 찾아와서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일 한국인들의 비밀 모임이 있는데 동참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스기하라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단체를 만들고 운동을 하는 건 필요하기도 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며.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스기하라는 소설을 읽는 친구에게 묻는다. 책장을 덮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설을 읽어서 무엇하느냐며. 그러자 소중한 친구 정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혼자서 묵묵히 소설을 읽는 인간은 집회에 모인 백 명의 인간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어. 그런 인간이 늘어나면 세상은 좀 더 좋아질 거야.
작가의 역사관은 작품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묘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성인이 된 재일한국인은 관공서에 가서 의무적으로 지문을 찍어야 했다. ‘외국인 지문 날인’ 제도 때문이다. (외국인 차별을 이유로 1991년에서야 폐지되었다). 스기하라의 선배는 자신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관공서 직원들을 다 때려 주겠다는 마음으로 출석한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만난 직원은 연신 ‘미안하다’고 읊조리며, 지문 찍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가려준다. 선배는 분노를 누구에게 풀어야 할지 몰라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또 스기하라의 아버지가 북한으로 건너간 친동생의 비보를 전해 듣고, 택시 안에서 동생과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자 일본인 택시 기사는 택시비를 사양한다. 북한에서 돌아가신 동생분에게 전해달라며 정중히 조의를 표한다.
“넓은 세상을 보라”는 말의 슬픔
사쿠라이와의 관계가 결국 삐걱거리자, 스기하라는 자신의 피부가 차라리 초록색이어서 누구든 자기가 이상한 사람인 줄 먼저 알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일본은 지긋지긋하다며 여기서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 사람이 되겠다고 오기를 부린다. 아버지는 그런 스기하라에게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스페인어로.
나는 조선 사람도 아니고 일본 사람도 아니고,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
아버지는 스기하라에게 국적 같은 건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며(본인이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넓은 바다를 보여준다.
이런 어둠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둠을 모르는 인간이 빛의 밝음을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니체가 말했어. 누구든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래도록 나락을 들여보다 보면 나락 또한 내 쪽을 들여다보는 법’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조심하라구.
소설 〈GO〉는 주인공 스기하라의 “이것은 나의 연애 이야기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 평범한 연애를 해보려는데 국적이 장애물이 되고, 국적 때문에 소중한 친구들을 잃어버린다. 그깟 국적 따위 돈 몇 푼에 팔아도 상관없다고 소리칠수록 국적의 굴레는 선명해진다. 그래서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
스기하라가 이 이야기는 자신의 연애 이야기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 평범한 연애를 해보려는데 자신의 국적이 장애물이 되었고, 또 국적 때문에 소중한 친구들을 잃는다. 국적은 돈 몇 푼에 팔아도 상관없다고 소리칠수록 그 국적의 굴레는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라는 아버지의 당부는 조금 슬프게 들린다.
한 아버지의 전하지 못한 말
얼마 전 참여한 행사에서 한 연사분을 만났다. 그분은 자신이 재일한국인 3세라는 사실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류 정리를 하다가 알게 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아버지 역시 일본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자신은 일본인이라고만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누가 비난할 수 있나.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의무적으로 남겨야 했던 국가 기록 덕분에, 그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대구를 방문해서 할아버지의 지인을 만나보기도 했고, 아버지가 근무했다는 파친코를 찾아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국적이 무슨 상관이냐고, 사자는 본인이 사자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을 거라던 스기하라. 결국 그도 재일조선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국적을 바꾸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았을까. 마치 이 소설의 작가인 가네시로 카즈키 역시 일본으로 귀화한 것처럼.
역시 소설과 영화에서 스기하라의 연애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국적, 이름에 관계없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작품의 메시지대로.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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